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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기사적 허용

등록 2022-03-31 16:31수정 2022-04-01 02:31

신용현 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언론사 취재진을 앞에 두고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신용현 20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대변인이 지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인수위 기자회견장에서 언론사 취재진을 앞에 두고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민제 | 기후변화팀 기자

마감 30분 전. 오늘 써야 할 기사 분량은 200자 원고지 기준으로 총 8매다. 아직 나에겐 4매가 남았다. 지금부터는 머리보다 손가락이 더욱 분주해지는 시간이다. 취재는 다 마쳤으니 최대한 빠른 타자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겨우 기사를 완성한다. 비교적 가라앉은 마음이 되어 초고를 살펴본다. 한숨 돌리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 거슬리는 지점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여느 때와 다름없다. 이번에도 시적 허용 못지않은 ‘기사적 허용’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취재를 종합하면’이나 ‘모처 관계자 설명을 보면’으로 시작한 기사는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는 소식을 지나 전문가들이 ‘입을 모았다’거나 ‘지적이 나온다’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일상적인 대화에서라면 사용하지 않을 낯선 표현이지만 기사를 쓸 때만큼은 손에 잘 붙는다. 취재를 종합한다는 것은, 분통을 터뜨린다는 것은 다 무엇일까. 입은 어떻게 모아지나. 지적과 우려는 어디에서 자꾸 나오는 것일까. 기사 속에서만 유독 쉽게 허락되는 말들을 볼 때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여태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표현보다는 내용을 탄탄히 하는 것부터 신경 쓰라고, 분량과 속도, 취재원 보호까지 고려할 게 많은 글을 쓰다 보면 별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다. 그럼에도 민망함과 멋쩍음이 따라오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기자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동떨어져 있다고 실감하는 순간은 이렇게 찾아온다. 기사는 현실을 생생하게 조명하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 안의 문장들은 세상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한 채 어떤 시공간에 머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더구나 기후변화 분야를 담당하는 나의 기사에는 2050 탄소중립이랄지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이산화탄소 환산량, 20대 대선 국면에서 뜻밖의 주목을 받은 RE100(재생에너지 100% 사용) 같은 전문 용어들이 부득이하게 들어가야 한다. 영역을 달리해도 처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부 정책과 정치권 공방, 산업 동향, 사법기관의 판결, 국제사회 정세 등 단숨에 따라잡기엔 버거운 정보가 기사에는 가득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친근하지 못한 표현까지 더해진다면 기사가 먼 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지도 모른다.

때때로 독자들로부터 기사적 허용을 넘어 기술적 회피가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도 한다. 얼마 전 에스엔에스(SNS·사회관계망서비스)를 돌아다니다 “‘일각에서 ~라는 지적이 나온다’라는 표현을 본다면, 그냥 기자 생각이 그렇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는 내용의 게시글을 봤다. 기자들이 비판의 주체를 은근슬쩍 가린 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적는다고 귀띔을 해주는 모양이었다. 유사품으로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기자가 논란을 만드는 중이다’가 있다고도 했다. 취재원들의 목소리를 확인한 뒤 관성적으로 붙이는 표현들이라 조금은 억울하다 싶다가도 아예 틀린 소리라고 말하려니 다시 뜨끔해졌다.

마감 시각에 쫓겨 쓴 기사를 보고 ‘현타’(현실 자각 타임)를 맞는 일은 자주 찾아온다. 바쁘고 바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대중들로부터 선택을 받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기자들만 주로 쓰는 말들로 범벅된 기사를 낸 날에는 유독 뒷맛이 쓰다. 내 기사를 클릭하게 된 이름 모를 독자는 어떤 속도로 스크롤을 내릴까. 취재원이 망설임 끝에 내어준 정보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을까. 걱정이 따라오지만 기자의 언어에 익숙한 소수의 세계에 갇히지 말자고 다짐할 뿐이다.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보다 슬기로워질 것이라고 떠넘기며. 손끝엔 기사 속 문투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사 반응이 기대에 못 미쳐 분통이 터진 김아무개 기자가 잔업을 뒤로한 채 퇴근해 논란이 예상된다. 본인이 써놓고 누굴 탓하겠냐는 반응이 지배적인 가운데, 일각에서는 다음날 발제를 준비하지 않고 집에 가는 것은 무책임한 처사라는 지적이 나온다….’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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