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지속가능하도록 기꺼이 헌신할 마음만 있다면 그 이유야 다양할수록 좋을 수도 있겠다. 공동체에는 사람과 사람 이외의 생명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모든 존재들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돌(Dole)사의 바나나나 파인애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먹어보았을 듯하다. 과일 통조림에서도 익숙하게 발견할 수 있는 로고라 제법 친숙하게 느껴질 만한 브랜드다. 회사 이름이나 제품 이름인 줄 알았던 돌이 사람 이름임을 알게 된 건 하와이를 여행하면서다.
와이키키에서 할레이바로 가는 길, 어쩐지 제주도 중산간 느낌이 물씬 나는 풍경을 보며 달리다 보면 빈 들판 위로 돌 플랜테이션 농장이 나타난다. 유명하다는 파인애플 아이스크림도 먹을 겸 내려서 이것저것 구경하다 돌 플랜테이션의 창업주가 제임스 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구나 그의 사촌은 하와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인 샌퍼드 돌이라고 한다. 그러려니 하고 돌아서다 문득 낯설다. 하와이라면 왕국이었다가 미국의 50번째 주로 복속되어 지금은 미연방의 일부가 아니던가. 하와이 공화국, 이 따로 있었던가. 미국 대통령이 아닌 하와이의 대통령이 따로 존재했던가.
모든 공화국의 이야기가 자유, 평등, 박애 따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시작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와이 공화국의 이야기는 관세로부터 출발한다. 1778년 하와이가 ‘발견’된 이후 많은 나라 사람들이 하와이를 드나들게 되었다. 포경선과 상선, 선원과 선교사들, 동물과 식물, 뿐이랴 인플루엔자, 홍역, 매독 같은 질병도 함께 밀려들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홀로 자리한 덕에 오랜 세월 독자적인 삶의 방식을 유지하던 하와이는 오히려 그 지정학적 위치 덕에 무역과 군사 요충지로 급부상한다.
신생 독립국 미국 역시 일찌감치 하와이 왕실과 교류를 시작했다. 탐험가, 교육자, 의료 종사자, 기업가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섬으로 건너왔다. 샌퍼드 돌의 부모 역시 이 시기 하와이로 들어온 선교사였다. 돌은 1844년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절대왕정 시절에 태어나 하와이의 바람과 햇빛과 바다 속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샌퍼드 돌은 미국으로 유학 가 법률 공부를 하며 청년기를 지낸 후 다시 하와이로 돌아온다. 전세계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샌퍼드 돌 역시 그 경계에 있었다. 왕정과 공화정, 원주민과 백인, 제국주의와 식민지, 여성과 남성, 미개한 것과 선진적인 것 사이에 그도 놓여 있었다. 하와이의 자연이 그의 몸을 키웠다면 새롭게 탄생한 근대국가의 법제도가 아마도 그의 정체성을 형성하였으리라. 미국 시민 샌퍼드 돌은 하와이로 돌아와 변호사 개업을 한다.
대부분의 왕정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하와이 역시 토지공개념을 근간으로 왕국을 경영하였으나 1850년대가 되면서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승인하게 된다. 대외부채를 안고 있던 하와이 정부는 토지를 매각하여 왕실 빚을 갚지만 1862년께가 되면 하와이제도의 약 75%가 외국인 소유가 되고 만다. 땅을 사들인 백인들은 철도를 건설하고 도시를 조성하고 엄청난 양의 물을 사용하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만든다. 사탕수수 농장은 하와이의 기간산업이 되었다. 농장주들의 대부분은 미국 백인 남성이었다. 변호사로 일하며 하와이 의회 의원으로도 당선되어 입법부에서 활동하던 샌퍼드 돌은 1887년 칼라카우아 왕에 의해 하와이 대법원 판사로 임명된다. 돌은 사법부의 수장이면서 또한 호놀룰루 라이플스라는 사탕수수 농장주 조직의 일원이기도 했다. 문제는 임명권자와 호놀룰루 라이플스의 이익이 대척점에 놓여 있다는 점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주들의 최대 관심사는 관세였다. 하와이 정부는 1875년 미국과 상호협정을 체결하는데 하와이의 모든 생산품을 비과세로 미국에 수출하는 내용이었다. 하와이 농장주들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약이었다. 대신 ‘하와이의 어떠한 영토도 미국 외의 다른 국가에 양도, 대여할 수 없으며 특권도 부여할 수 없다’는 조항에도 합의해야 했다. 이를 바탕으로 미국은 진주만의 독점 사용권을 요구한다. 무역에서 최대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농장주들은 미국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더 나아가 대부분이 미국인들이었던 농장주들은 하와이가 미국과 합병되기를 바랐다. 하와이가 미국이 된다면 국가 간 무역이 아닌 고로 당연히 관세가 폐지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하와이 왕실에 대한 반역에 해당하므로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농장주 조직은 백인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입법부에 군주의 권력을 최소화하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추동한다. 이 법률의 초안을 작성한 이들이 샌퍼드 돌을 비롯한 미국계 법률가들이었다. 그들은 왕의 권력을 내각으로 이동하고 참정권을 제약해 하와이 인구 3분의 2가 의사결정에서 제외되도록 하는 내용의 새로운 법률을 만든다. 이전까지 아시아계 이주민 남성들에게 주어졌던 참정권도 없애고 상당한 규모의 재산이 있어야만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한 것이다. 참정권을 유지한 것은 부유한 백인 남성으로 한정되었다. 칼라카우아 왕은 협박과 강요하에 이 새로운 헌법에 서명하게 되는데, 이를 하와이 사람들이 ‘총검 헌법’이라 부르는 이유다.
문제는 칼라카우아 왕의 동생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등극하면서다. 여왕은 미국인의 농장을 국영화하는 조치를 취하고 총검 헌법도 무력화시켜서 자신의 내각을 구성하고자 했다. 미국 농장주들은 여왕의 정책에 반발해 미군의 개입을 요청한다. 미국인의 생명 및 재산의 안전 확보를 명분으로 미 무장 해병대가 호놀룰루항에 상륙한다. 여왕의 집무실이자 관저인 이올라니궁은 무장한 군인들에게 둘러싸인다. 그들은 여왕을 강제 퇴위시키고 임시정부를 구성해 하와이의 미국 편입을 요청한다. 미국이 이를 보류하자 그들은 임시정부를 하와이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하고 새로운 국가의 탄생을 선언한다. 1894년이었다.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해다.
초대 대통령으로 샌퍼드 돌이 취임하였다. 하와이 공화국의 국가 과제는 미국과의 합병이었다. 1898년 마침내 미국과 합병되고 샌퍼드 돌은 초대 총독이 된다. 그는 하와이에서 태어나 하와이에서 살았지만 한번도 하와이 사람인 적은 없었던 듯하다. 하와이의 물을 마시고 하와이 땅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하와이 왕에 의해 중용되지만 소수 미국인과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대통령이 되고 공화국을 만든 사람의 이야기다.
대통령이 되고 싶은 사람들,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지속가능하도록 기꺼이 헌신할 마음만 있다면 그 이유야 다양할수록 좋을 수도 있겠다. 공동체에는 사람과 사람 이외의 생명들이 공존하고 있으며 그 모든 존재들이 동등하게 존엄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