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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의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등록 2023-12-19 17:08수정 2023-12-20 02:39

영화 ‘서울의 봄’ 속 이태신 장군의 처(전수지 분)는 몹시도 부드럽고 단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정의와 부정의로 나뉘어 싸우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남자들의 역사, 그 이면에는 여자들의 역사가 있지 않을까.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서울의 봄’ 속 이태신 장군의 처(전수지 분)는 몹시도 부드럽고 단아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정의와 부정의로 나뉘어 싸우며 역사를 만들어가는 남자들의 역사, 그 이면에는 여자들의 역사가 있지 않을까.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그런데 왜 감독은 쿠데타를 막으려던 이태신(정우성 분)의 아내는 몹시도 부드럽고 단아한 사람으로 그렸을까? 그녀는 바쁜 이태신을 위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고 생사기로에 선 이태신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마는 한가하지만 애절한 이야기를 한다. 남편이 저토록 세상의 풍파를 겪는 동안 어째서 그녀는 저다지 무구할까? 혹은 무구하게 그려질까?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올해 극장에서 영화를 네편이나 보았다. 최근 몇년 동안 제일 많이 본 셈이다. 가장 큰 이유는 리클라이너관을 발견해서다. 처음 리클라이너관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두다리 쭉 펴고 누워 영화를 보다니. 두시간 넘도록 영화를 보는데 몸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 몰입도도 높았다. 신세계를 경험하고 나니 극장에서 영화 보는 일이 다시 즐거워졌다. 늙었나봐, 영화 보는 일이 재밌지 않아, 했었는데 허리 아프고 다리 아픈 게 문제였지 영화 보기는 여전히 삶의 즐거움 중 하나였음을 깨달았다. 장애가 시스템에 의해 장애가 아닐 수 있음을 실감했다.

‘서울의 봄’도 리클라이너관에서 보았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어났던 12·12 쿠데타를 재현 복원한 이야기였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9시간 동안 일어났던 일을 촘촘히 되풀이해서 보니 아하, 아하 이해도 되고 맙소사, 미리 막을 기회가 있었구나, 복잡한 심경으로 관람하게 됐다.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어찌나 긴장감 있던지 손끝이 계속 차가웠다.

영화가 끝나고 거리로 나와 젊은 벗과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아이고, 흥분이 안 가라앉아. 맞아요, 두시간 반이 한시간 반으로 느껴져요. 연기 너무 잘하지? 그러니까요, 저 하나도 몰랐던 이야기인데 아 저런 사건이 있었구나, 이해가 잘돼요. 젊은 벗은 2000년생이다.

그런데 우리 열심히 살아야 한다. 저 봐라. 멋진 남자 야비한 남자 비굴한 남자 의젓한 남자 갈등하는 남자 배신하는 남자 폭압적인 남자 총 쏘는 남자 총 맞는 남자 고문하는 남자 미국 남자 정치하는 남자…. 재능 있는 남자 감독과 노련한 남자 배우들이 남자들의 서사를 저렇게 꼼꼼히 기억하고 기록하고 전승하는 작업을 하잖냐. 잘 만든 영화일수록 세상이 남자들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은 위험한 착시를 주니 음, 어렵다. 그러게요 열심히 써요 우리. 이상한 결론인데. 우리는 깔깔 웃으며 헤어졌다. 어찌나 강렬한지 집에 와서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런데 왜 감독은 쿠데타를 막으려던 이태신(정우성 분)의 아내는 몹시도 부드럽고 단아한 사람으로 그렸을까? 그녀는 바쁜 이태신을 위해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고 생사기로에 선 이태신에게 된장찌개를 끓여주마는 한가하지만 애절한 이야기를 한다. 남편이 저토록 세상의 풍파를 겪는 동안 어째서 그녀는 저다지 무구할까? 혹은 무구하게 그려질까? 다정하고 순결하지만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몰라서일까, 남편은 그녀에게 자신의 상황을 알리지 않는다. 부부가 그래도 되나? 세파를 함께 이겨가기로 약속한 사이라면 다가올 역경에 힌트라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관련한 글들을 찾아 읽어보니 그날 이후 이태신 같은 쿠데타세력을 막으려던 남자들은 강제전역을 당하거나 험한 꼴을 당한다.

자, 이제 그녀들의 이야기는 영화 밖에서 본격 전개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남편을 돌보고, 충격을 받은 아이들을 다독이고, 화병이 난 양가 부모님을 돌보고, 가정경제를 떠안고, 세상의 평판에 맞서고, 죽어간 남편 부하의 아내를 챙기고, 감옥에 간 주변인 옥바라지를 함께하고, 재판을 참관하고, 된장찌개를 끓이고, 빨래하고,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날의 일을 재구성하고, 마음속에 칼을 갈고. 그렇다, 그녀들의 이야기는 영화 밖에 있다. 12월12일 이후에도 세상은 계속되고 봄은 올해가 아니라 내년에도 올 테니까, 와야 하니까.

내가 영화 밖 이야기를 알게 된 건 ‘박영숙을 만나다’라는 책을 내게 되면서다. 박영숙 선생은 한국여성재단을 만들었으며 여성환경연대의 대표였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한 평화민주당 부총재를 지냈다. 남편 안병무 선생은 유신독재에 맞섰다. 1976년 3월1일 안병무 선생을 비롯한 김대중, 이우정, 함석헌, 윤보선, 정일형 등 열두명은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다. 서슬이 퍼렇던 유신체제 아래서 이 사건은 ‘일부 재야인사들의 정부전복 선동 사건’으로 규정되고 관련자 대부분이 구속된다.

법정에서 피고인들이 싸우는 동안 박영숙 선생을 비롯해, 이희호 여사, 공덕귀 여사, 박용길 여사, 이종옥 여사 등은 다양한 형태로 싸움을 전개해 나간다. 전 영부인(윤보선 대통령의 부인)과 미래의 영부인(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이 함께 거리에서 싸웠다. 그들은 행진하고 재판정 앞에서 시위하고 공개재판을 요구하며 투쟁한다.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한복을 맞추어 입고 하얀 양산에 ‘민주주의 회복’이라고 써서 받쳐 들고 재판정 앞에서 싸운다.

이들의 모습은 자주 외신의 취재 대상이 되었다. 보도통제로 국내 언론에 단 한줄도 보도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건의 전모를 세계에 알리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떻게든 구속의 부당함을 알리고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세상에 전해야 했으므로 그녀들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갖가지 시위를 해나갔다. 부활절 새벽에는 서울구치소 뒷산에 올라가 부활절 새벽송을 부르고, 빅토리숄이라 이름 붙인 보라색 숄을 뜨개질해 판매하고, 십자가 열둘을 새긴 둥근 메달이 달린 목걸이와 초기 기독교도들의 수난을 상징하는 물고기 모양의 티스푼 등을 제작해 국내외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에게 팔아 옥바라지에 보탰다. 연행되고 감시당하고 구속되면서도 농성과 시위를 이어나갔다. 서로의 아이들을 함께 돌보았으며 공동으로 살림을 꾸리고 몸과 마음을 지키고 북돋웠다. 신뢰는 깊어졌고 정은 두터워졌고 뜻은 확고해졌다. 기자들은 종종 이들의 구속자 가족답지 않음에 의아해했지만 그녀들은 창의적으로 연대하며 겨울을 버티고 여름을 견디고 가을을 지켜냈다. 봄이 다시 올 수 있도록.

종종 세상은 남자들에 의해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드러나지만, 쓰이지만 그럴 리 없다. 사피엔스의 역사는 여성과 남성이 더불어 운영하고 경영해온 과정이다. 다만 기록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려 있을 뿐이다. 전두광, 정상호, 노태건…. ‘서울의 봄’ 등장인물들은 모두 이름을 갖는다. 악인이건 정의로운 사람이건 비겁한 사람이건. 이태신의 아내는 이름이 없다. 계백장군 이래 장군의 아내는 이름이 없다. 그녀가 보냈을 여름과 가을, 겨울 그리고 새로운 봄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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