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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내게 주어진 6매의 세상 [슬기로운 기자생활]

등록 2022-04-14 16:30수정 2022-08-22 13:47

스마트폰의 확산은 미디어 이용행태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많은 신문사가 디지털 전환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스마트폰의 확산은 미디어 이용행태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많은 신문사가 디지털 전환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슬기로운 기자생활] 신민정|법조팀 기자

재판을 보다 보면 ‘인간이란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존재일까’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ㅎ씨도 ‘복잡한’ 사람 중 한명이다. 이주여성인 ㅎ씨는 한국인 남편으로부터 매달 생활비를 받으며 생계를 꾸려온 평범한 주부였다. 그런데 남편이 주는 월 20만~30만원으로는 생활이 힘들자 보이스피싱 조직의 유혹에 넘어갔고, 자신이 범죄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석달간 6명에게 8300만원을 뜯어냈다. 이중 ㅎ씨가 얻은 범죄 수익은 680만원. ㅎ씨는 이 돈을 생활비와 고령의 부모님 병원비로, 그리고 아픈 아이들을 돕는 엔지오(NGO)에 매달 2만원씩 정기후원하는 데 사용했다.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는 ㅎ씨는 통역인을 통해 “착하게 살라고 가르친 부모님 말씀에 따라 평소 유기견 봉사활동도 하고, 헌혈도 많이 해왔다”고 울먹였다. 사기 범죄 피고인이면서 후원자·봉사자인 ㅎ씨. 보이스피싱 피해자는 ㅎ씨를 떠올리며 피눈물을 흘릴 테지만, 누군가는 ㅎ씨의 선의 덕분에 목숨을 구했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평면적이라면 기사 쓰기가 좀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안타깝게도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없는 인간들의 세상은 입체적이다. ㅎ씨의 사례를 기사로 쓴다고 생각해봤다. ‘50대 이주여성이 8300만원 상당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벌인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내용만 담는다면 원고지 3매(600자)로도 충분히 쓸 수 있다. 그런데 이는 ㅎ씨 사건의 여러 맥락이 제거된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ㅎ씨가 한국인과 결혼해 이주한 이유는 무엇인지,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순 없었던 건지, 범죄 수익으로 기부한 이유는 무엇이며 보이스피싱 조직이 이주민을 속여 범죄에 끌어들인 사례가 ㅎ씨뿐인지 등을 기사에 담아야 조금이나마 이 사건의 실체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최소 7매(1400자)는 써야 한다. 인간이라는 우주가 워낙 복잡하다 보니 기사도 덩달아 길고 복잡해진다.

기사 매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요즘 최대 고민거리가 기사 분량이기 때문이다. <한겨레>를 비롯한 대부분의 신문사는 거대한 디지털의 파도를 맞아 지면 중심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디지털 전환을 꾀하고 있다. 현장에서 체감하는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기사 분량에서 비교적 자유로워졌다는 점이다. 5년 전 입사 당시만 해도 각각의 기사에 대해 그날 할애된 지면 크기에 맞게 7매면 7매, 5매면 5매 딱 맞춰서 기사를 올리는 것이 꽤 중요했다. 제한된 길이만큼만 써야 하다 보니 ‘어떤 내용이 가장 핵심일까’ ‘문장은 보다 짧게 쓸 수 없을까’를 고민하는, 기자로서 꼭 필요한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좀 더 다양한 입장을 넣거나 스토리텔링 식으로 기사를 길게 써보고 싶어도 제한된 분량상 시도가 어렵다는 거였다. 그래서인지 신문사가 디지털 전환의 바다로 나가게 됐을 때, 나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 긴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여러 정보를 담은 기사가 좋지 않을까?’ ‘클릭 수는 좀 많이 떨어지겠지만 이런 기사도 있어야지’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말이다.

최근 ‘독자가 포털에서 가장 선호하는 기사는 6매’라는 분석을 봤다. 너무 긴 기사는 독자가 읽다 지쳐 떠난다는 자명한 사실을 새삼 떠올리며 다시 기사를 최대한 짧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 요즘 일부 언론사나 포털이 5~6매 안팎의 길지 않은 기사에 대해서도 ‘기사 요약 서비스’를 제공하는 걸 보면, 짧은 기사에 대한 선호가 높은 건 분명한 듯하다. 내게 주어진 6매의 세상, 그 안에 최대한 꾹꾹 눌러 담아 보는 수밖에. 그럼에도 가끔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삶과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선 배경과 맥락을 덧붙인 긴 기사도 많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가 됐든 적당한 절충점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나름 디지털 기기엔 익숙하다고 자부해왔는데 디지털 기사 전략은 너무 어렵다. 디지털, 넌 대체 뭐니.

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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