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미국이나 한국이나 글값이 용돈 수준이 아니고 생활비 정도가 되려면 꽤 많은 글을 다양한 매체에 써야만 한다. 뉴욕에선 미술전문지를 포함해 여행잡지, 패션잡지, 온라인 구독서비스를 넘나들며 한달에 평균 10편 안팎으로 취재 기반의 글을 쓰곤 했다. 제주로 오면서 뉴욕에서만 쓸 수 있던 글쓰기가 끝나버린 게 아쉬웠다. 그런데 글 쓸 거리가 풍부하고 전세계 셀럽이 모여 사는 대도시 뉴욕보다 제주에서 온갖 분야의 코즈모폴리턴을 자주 만났다는 건 기대하지 않은 부가 수익이었다. 대도시엔 다양한 사람이 오가지만 진지한 교류를 하는 범위는 되레 협소해진다. 일하는 시간에 쫓기고, 개인주의가 팽배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관광지 특성이 타인을 쉽게 환대하는 공기를 만드는 것인지, 마음과 시간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역으로 제주에 모여드는 것인지, 상관관계를 정확히 짚을 수는 없다. 하지만 확실히 도시와는 다른 어떤 왕성하고 깊은 인적 교류가 중소도시 제주에선 대도시보다 쉬운 확률로 빈번히 일어난다. 적어도 내 경험엔 그렇다.
2015년에 제주로 돌아와서 제일 처음 사귄 친구가 한명 있다. 뉴욕에서 들어온 지 거의 일주일 만이어서 시차 적응도 안 된 시점이었다. 외국에서 손님이 오거나 타 지역에서 지인들이 오면 내가 일하던 미술관을 드나들어서, 처음엔 멋대로 그가 프라이빗 여행가이드인 줄 알았다. 여행사처럼 늘 손님들이 있었고, 미술관에 직접 운전해서 데려오곤 했다. 내게 연락을 주면 손님들에게 전시 안내를 하고, 당연하게 그들에 섞여 밥을 먹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곤 했다. 손님들은 대개 국내외를 오가며 신문에서 보는 명사들이었다.
개인적인 질문을 할 일도 없고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두세번을 만나고서야 그가 제주로 사옥을 옮긴 유명 게임회사의 대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고도 달라진 건 별로 없었지만. 뉴욕 출장을 간다며 볼만한 전시를 소개해달라고 하면, 아직 의식의 절반은 뉴욕에 살고 있던 내가 열심히 이것저것 알려주고, 훌륭한 학생이자 열렬한 문화애호가였던 그는 소개받은 전시며 카페나 식당을 숙제하듯 일일이 찾아가 보고는 피드백을 줬다. 소개해준 첼시 갤러리의 전시 소개 자료 수십장을 들른 곳마다 꼼꼼하게 챙겨와 전해줘서 웃은 기억이 있다.
제주시 동문시장에 숨겨져 있는 3500원짜리 멸치국수를 먹으면서 뉴욕에서 공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비기를 알려줬는데, 그걸 기억했다가 다녀와서는 아주 좋아하는 눈치라 놀랐던 기억도 있다. 참고로 2015년 즈음 뉴욕 첼시의 하우저 앤 워스 갤러리 디터 로스 바에선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마다 공짜 에스프레소 샷을 줬다. 국외 출장이 잦은 만큼 전세계 구석구석을 다니길 즐겼던 이에게 제공할 꿀정보는, 매달 여행잡지 패션잡지에 뉴욕의 신상 정보를 공급하며 인형에 눈알 붙이듯 생계를 잇던 내겐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별로 연결 지점이 없을 것 같은 제주의 미술관 큐레이터와 글로벌 게임회사 대표와의 인연이 이어졌나 보다. 그리고 책.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던 그랑 책에 대한 이야기도 즐겨 했는데, 전세계의 소설이나 에세이를 닥치는 대로 읽는 취향이 비슷했다.
농담처럼 출장 중에 객사할 운명이라는 말을 자주 했던, 농담같이 국외에서 갑자기 떠나버린 친구의 부고를 접한 지도 어느새 두달이 되어간다. 출퇴근길마다 그가 운영하던 회사와 박물관을 지난다. 매일 서너번씩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을 지나칠 때마다 당연하게 지금은 없는 사람이 떠오른다. 왜인지 친구가 뉴욕 출장길마다 들렀던, 에스프레소 바를 만든 디터 로스의 아들들에게 디터 로스가 했다는 유언도 함께 떠오른다. “내가 만약 다음 역에서 먼저 내리더라도, 넌 기차를 계속 타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