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CCTV도 없는데 말만 갖고 어떻게 수사해” [슬기로운 기자생활]

등록 2022-04-21 18:00수정 2022-08-22 13:46

[슬기로운 기자생활] 임재우 | 젠더팀 기자

젠더팀에서 일하다 보면 성범죄 피해자를 주로 대리하는 변호사나 피해자 지원단체와 연락할 일이 잦다. 그런데 어느 무렵부터, 체감하기로는 지난해 말부터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예전 같으면 며칠이면 수사할 데이트폭력 사건 처리가 8~9개월씩 늘어져요.” “경찰이 불송치 결정을 했는데 사유가 한두 줄이에요. ‘증거 불충분하여 혐의 없음. 불송치함’.”

지난해부터 검경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의 수사지휘권이 폐지되고, 경찰이 온전한 1차 수사종결권을 갖게 됐다. 변호사와 지원단체는 이때부터 수사가 길어졌고, 수사 끝에 불송치를 하더라도 사유가 한두 줄이어서 이의제기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 이유를 알아야 이를 보완해 이의제기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부실한 불송치 이유들을 한데 모아서 공론화할 방법까지 생각했다”는 피해자 지원단체도 있었다.

친밀한 관계에서 벌어지는 범죄, 예컨대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 친족 성폭력 사건 수사가 취약해졌다는 우려가 컸다. 이런 범죄는 오랜 기간에 걸쳐 은밀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피해자가 견디다 못해 뒤늦게 고소하는 편이어서 ‘직접증거’가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디지털 포렌식으로 얻은 문자·녹취 등 정황증거를 통해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수사권 조정 이후 “시시티브이(CCTV)도 남아 있지 않은데 말만 갖고 어떻게 수사를 하냐”며 ‘정황증거’ 수집에 난색을 보이는 경우가 늘었다고 했다.

경찰의 게으름 탓이 아니다. 성범죄 피해자를 주로 대리해온 한 변호사는 수사권 조정의 ‘적응기간’을 거치는 중일 것이라고 했다. “진술 신빙성 판단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는 증거를 수집해야 하는 영역이라 수사 경험치가 많은 이들이 일정한 노력을 투입해야 해요. 그런데 일거리가 갑자기 늘어난 탓에 경찰이 모든 사건에 그런 노력을 쏟기 어려워진 것이죠.” 지난 1년여 검경은 여전히 수사권 조정의 여파를 통과 중이었고, 성범죄 피해자들과 피해자 지원단체 역시 그랬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이 추진하는 수사-기소권 분리 법안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짐짓 흘려보냈던 이런 이야기들이다.

이번 법안은 검찰청법과 형사소송법에서 규정하는 검사의 수사권 관련 조항을 대부분 ‘삭제’했다. 검찰이 쌓아온 각종 업보에서 비롯된 ‘수사-기소 분리’라는 대의를 꼼꼼하게 관철한 법안이다. 이 법안이 실현되면 검찰의 보완적 수사는 사라지고 보완수사 ‘요구’만 할 수 있다.

피해자 지원단체 관계자는 ‘두번째 기회’가 사라질 수 있다고 걱정했다. “피해자들은 경찰이 불송치하더라도 검찰이 다시 한번 사건을 살펴보고 기소·불기소 결정을 할 때까지 사건의 실체가 규명될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아요.” 한 피해자 대리 변호사는 자신이 최근 수임했던 데이트폭력 사건 이야기를 했다. 경찰의 불송치 결정 뒤 검찰의 보완수사로 디지털 증거의 생성일이 새롭게 확인돼 피해자가 진술한 시간·장소의 신빙성이 입증됐고, 결국 기소로 이어진 사례였다. 검찰의 수사지휘가 사라진 상황에서 보완수사가 경찰의 시야에서 누락된 형사사건을 ‘크로스체크’하는 기능을 해온 걸 무시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걸 주저하고 있었다. “검찰 편을 들어주는 것같이” 비칠까봐, “경찰은 무능하니 검찰에 힘을 몰아주자는 주장을 펴는 것같이 보일까봐” 그랬다. ‘검찰개혁’에 고개를 끄덕이던 이들이 ‘검찰개혁’을 위해 밀어붙이고 있는 법안이 통과될까 봐 속앓이하는 이상한 상황이다. 민주당의 입법 속도전이 검찰의 변화를 바라는 현장의 다양한 목소리가 숙의될 기회마저 ‘박탈’하는 결과를 낳고 있는 셈이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완곡하게 제기되는 “속도를 중요시하다가 방향을 잃는 것” 아닌지 하는 우려가 무시되지 않았으면 한다. ‘검찰개혁’ 네 글자가 주는 분노와 열광에 좌우되는 정치가 누굴 위한 것인지 되물을 때인지도 모르겠다.

abbad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1.

그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뉴스룸에서]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2.

학교예술강사 예산 72% 삭감…‘K-컬처’ 미래를 포기하나 [왜냐면]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3.

[사설] ‘김건희’ 위해 “돌 맞고 가겠다”는 윤 대통령

윤석열 부부가 모르는 것 한가지 [강준만 칼럼] 4.

윤석열 부부가 모르는 것 한가지 [강준만 칼럼]

‘지옥에서 온 판사’ 잘나가는 이유 [홍성수 칼럼] 5.

‘지옥에서 온 판사’ 잘나가는 이유 [홍성수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