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 | 경제팀 기자
누구나 조금씩은 그렇겠지만 나는 칭찬에 약하다. 어릴 적엔 ‘열심히’만 하면 대단한 재능이 없이도 칭찬을 들을 수 있었고 유년기도 내내 남부럽지 않을 만큼 칭찬을 들으면서 자랐다. 그래도 칭찬 앞에서는 좀처럼 태연해질 수가 없다. 작은 칭찬이라도 들으면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가 온종일 기분 좋다. 일기장에 꼭꼭 적어두기도 했다. 큰 의미 없이 건네졌을 칭찬이 내 인생에 여러모로 영향을 미쳤다.
칭찬에 약하다는 것은 그저 칭찬 듣고 기뻐한다는 게 아니라 ‘칭찬을 따라다닌다’는 뜻이다. 칭찬받은 일은 더 잘하려고 안달 나고, 칭찬받지 못한 일은 내 길이 아니라며 버리는 것이다. 내 그나마의 재주인 글쓰기도 칭찬의 산물이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글이 아닌 그림에 칭찬해줬더라면 나는 그림을 더 연마했을 것이다. 펜이 아닌 붓을 쥐다가 기자가 아니라 디자이너가 되었을 수도 있겠다. 내가 20대 내내 고수했던 단발머리나 음악적 취향까지도 그렇게 정해져왔다.
심지어 주량마저 칭찬이 좌우했다. 한국 사회 전반이 그렇지만 특히 신문사는 술 잘 마시는 것을 미덕으로 아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평일에 후배 기자가 취재원과 낮술을 마시고 들어와도 기특하게 여길 정도다. 주량이 겨우 맥주 두잔이었던 나는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지난 5년간 콸콸 부어댔고, 이제는 정말 간이 부었는지 소주 한병까지는 마실 수 있다. “지혜 술 많이 늘었네”라는 선배들 ‘칭찬’이 날 끝없이 부추겨온 결과다.
하물며 일은 어떻겠는가. 이제는 어릴 때와 달라서 ‘열심히’만 하면 칭찬 못 듣는다. 칭찬에 길든 사람은 칭찬을 들을 때까지 열심히 한다. 그러다 회사 안팎에서 기사로 칭찬 좀 듣고 나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업무 외 시간을 다 쏟아부어 일해도 힘든 줄을 몰랐다. 칭찬이라는 무한 동력이 나를 팽팽 돌아가게 했다. 확실히 칭찬은 응원 이상의 것이었고 많은 것을 감내하게 해줬다. 장시간 노동도, 적은 월급도, 심지어 ‘기레기’라는 멸칭까지도.
나를 온통 흔들어온 칭찬이 요즘 내 뒤통수를 친다. 한때 아군이었던 칭찬이 부지불식간에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으로 탈바꿈해 날 공격한다. 최근에 투입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취재나 장관 후보자 인사검증 취재랄지, 칼럼 마감이나 대학원 과제, 취재원과의 저녁 약속도. 모두 내가 원해서 시작한 일인데 어느새 칭찬은커녕 실망시키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나를 발견했다. 칭찬에 으쓱해져서 어깨춤을 열심히 추다 어느 순간 어깨가 탈골된 것이다. “기대할게”라는 빈말마저 지금 내게는 너무나 무겁다.
최근 몇달간 나는 뭘 하든 선배를 붙잡고 “이런 건 처음 해봐서…” “요즘 몸이 안 좋아서…”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라며 ‘밑밥’을 열심히 깔았다. 선배들은 “너라면 잘해낼 거야”라고 격려해주곤 했는데 그럴 때면 도리어 힘이 더 빠지는 일이 반복됐다. 스스로도 나답지 않은 행동이라 의아했는데, 이런 걸 심리학에서는 ‘자기 불구화 전략’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인정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도 모르는 사이 핑계를 만들고 “기대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던 셈이다.
어쩌면 나 자체가 근 30년간 들어온 칭찬을 조잡하게 이어붙인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내 인생이 내 것인지 칭찬의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설령 그 칭찬이란 것이 진심 없이 툭툭 내뱉어진 것들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특히나 ‘날 위한 나’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한 나’를 더 예뻐하면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더더욱.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일은 아플 정도로 힘든 일이다.
나만 이런 증상을 겪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 그나마 다행이다. 서른이 넘어 느닷없이 몰려온 성장통이 고달프고 겸연쩍다. 내가 인정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지금도 나는 어떻게 해야 이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누군가를 실망시키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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