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일기도에 온대 저기압을 그리다 보면 국토 크기가 실감 난다. 북미대륙은 온대 저기압을 그려 넣고도 여백이 많이 남는다. 마이애미에는 소나기가 오는데 워싱턴에는 눈이 온다. 샌프란시스코는 해가 쨍쨍하다. 영토가 광활해 그 안에 다양한 날씨가 공존한다.
반면 한반도는 온대 저기압에 파묻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전국이 하나의 날씨 권역에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수도권은 맑은데, 서해안과 제주에는 함박눈이 쏟아진다. 장마철 집중호우로 강남에는 시간당 40㎜의 큰비가 쏟아지는데 강북에는 구름만 끼어 있다. 그런가 하면 남부지방은 폭염으로 들끓는다. 내륙에서는 날씨가 평탄한데도 강원 산간에는 폭설이 내리고, 울릉도 주변에는 강풍과 높은 파도가 인다. 같은 시각 전혀 다른 날씨가 펼쳐지는 걸 보면, 적어도 날씨 영토만큼은 한반도가 여느 나라 못지않게 광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광대한 아시아대륙과 태평양 사이에 놓여, 계절 따라 풍향이 급변한다. 여름이면 남풍을 타고 무더위와 태풍이 몰려오고, 겨울이면 북서풍을 따라 한파와 폭설이 찾아온다. 게다가 계절풍이 지표 위 다양성과 맞물려 복잡한 날씨를 만든다. 한반도에는 산과 섬이 많다. 똑같은 햇빛을 받더라도 육지와 바다, 평지와 산지가 매우 다르게 반응한다. 그 사이로 미로처럼 열린 바람길을 따라 열과 수증기가 흘러가며, 맑은 지역과 비나 눈이 오는 구역이 극명하게 갈린다.
고대문명 발상지는 대개 아열대와 온대 사이를 오가는 위도 30도 안팎에 있었다. 햇빛과 물이 풍부한 만큼 먹고사는 데 큰 지장이 없어 풍성한 문화를 꽃피웠다. 그로부터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 문명권 지도는 과학기술의 혜택을 받아 추운 지방으로 많이 확장한 모양새다. 부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중남미권 몇 나라를 제외하면 위도 30~60도의 분포를 보인다. 고위도로 갈수록 온대 저기압이 자주 지나다니는 극전선대에 가까워져, 날씨 다양성이 더욱 풍부한 곳으로 문명의 중심이 옮겨간 것이다.
영국이나 뉴질랜드 같은 섬나라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지만 대륙과는 떨어져 있어 계절풍의 변덕이 덜하다. 그리스나 이탈리아 같은 반도 국가는 산세가 험하지만, 인접한 지중해가 태평양보다 그릇이 작다. 게다가 아시아의 서쪽에 있는 탓에 대륙 고기압의 한기가 곧장 내려오기 어려운 기압 배치다. 프랑스의 기상학적 위상은 영국과 이탈리아의 중간에 가깝다. 우리나라 날씨는 이들 국가의 기후 특성을 일부 닮았으면서도, 계절마다 대륙과 해양의 영향이 뚜렷한 대조를 보이며, 날씨가 여느 국가보다 다채롭다.
생활 속에서 날씨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없다. 하와이에서는 알로하 반소매를 걸치고, 핀란드에서는 두꺼운 외투에 털모자를 쓴다. 오키나와에는 절인 음식이 발달하고, 몽골에선 말린 고기와 치즈를 갖고 다닌다. 무더운 곳에서 대청마루로 바람을 끌어들인다면, 추운 곳에서는 창문을 줄여 바람을 막는다. 덥고 건조한 아라비아반도에는 느린 곡조에 부드러운 율동이 있다면, 추운 북구에서는 빠른 선율에 뛰는 듯한 경쾌한 춤이 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 패션과 디자인 산업이 성한 배경에는 장인들의 예술 감각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날씨 다양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날씨 기복이 심한데다 여름과 겨울을 오가며 극심한 온습도 변화가 일어나는 곳에서는, 자연히 정서의 스펙트럼이 넓어지며 예술혼이 고양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음악, 영화를 비롯한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한류가 세계인의 귀와 눈을 사로잡은 데에는 한반도 특유의 날씨와 다양성이 한몫했을 거라고 믿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