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중부지방에 8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리면서 서울 곳곳이 물에 잠기고 지반침하, 정전 등 사고가 잇따랐다. 지하철 역사와 선로 등에 빗물이 들어차면서 열차가 곳곳에서 멈춰 섰고, 도로 침수 지역도 늘면서 퇴근길에는 고통스러운 “교통 대란”이 벌어졌다. 독자 제공 연합뉴스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치타는 발톱을 숨기고 살금살금 목표물에 다가선다. 그리고는 출발선에 선 육상선수처럼 땅을 밀쳐내려 사지의 근육에 힘을 가한다. 정지한 채로 잔뜩 웅크린 몸체는 활처럼 탄력이 붙고 정강이 부위에는 근육질이 탱탱해진 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이 한동안 이어진다. 먹을 것을 찾아 무리에서 이탈한 아기 사슴은 풀을 뜯으면서도 수시로 두귀를 쫑긋 세우고 주변을 경계하건만, 들판은 갑자기 찾아온 정적 속에 평온하기만 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치타는 전속력으로 내달리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놀란 사슴은 도망가보지만 이미 때를 놓치고 만다.
위험이 약한 틈새를 빠르게 파고드는 건 비단 동물의 왕국만의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미국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사태만 보더라도, 2천억달러(약 260조원) 이상 자산을 관리하던 은행이 미 국채가 하락하며 투자 손실을 보자 안전자산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지며 뱅크런으로 내몰리기까지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공행진해온 물가를 잡기 위해 통화긴축의 끈을 조여오자 금융권에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가 자산건전성이 약한 고리에서 순식간에 터진 것이다.
큰 위험은 선행학습이 어렵다. 시간당 강수량을 크기 순서로 정렬해보면, 큰 값에서 작은 값까지 천차만별이다. 아무래도 큰 피해를 유발하는 시간당 40㎜ 이상 강한 강수 그룹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데, 이 그룹은 표본 사례가 많지 않은 데다 그나마 각기 독특한 기상조건에서 비롯한 것이라 통계적 규칙성을 찾아내기 쉽지 않다.
위험이 크면 클수록 오래 뜸을 들인다. 일순간 강력한 폭발력을 내보이려면 평소보다 많은 에너지를 비축하느라 시간이 걸린다. 카운트다운을 눈앞에 두고도 상단까지 연료를 마저 채워 넣느라 차분하기만 한 우주발사장의 분위기처럼, 큰 위험의 전조는 희미하다. 게다가 한참 지나야 유사한 위험이 재발하므로, 경계심도 쉽게 허물어진다. 그래서 큰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알면서도 당하고 또 당한다.
장마철이 막바지에 이르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세력을 떨치며 우리나라를 넘나든다. 연일 햇빛을 받아 달궈진 아열대 해상에서 만들어진 고온다습한 기류가 남풍을 타고 유입한다. 고기압이 솥뚜껑이 되어 하층 대기를 가둬두면, 유입한 수증기는 계속 쌓여만 간다. 이런 기압 패턴이 고착되면 연일 폭염에 열대야가 이어지고, 불쾌지수가 높아 사소한 해프닝도 폭력사건으로 비화한다. 대기가 불안정하고 수증기 연료가 충분히 장전된 상황에서는 조그만 불쏘시개만 있어도 격렬한 소나기구름으로 발달한다.
1998년 7월31일 밤 지리산 자락에 몇시간 새 300㎜에 육박하는 강한 비가 쏟아졌다. 서쪽에서 다가오는 발달한 기압골과 북태평양 고기압 사이에서 남풍이 거세지며 지리산 사면에 수증기가 대거 유입하여 순식간에 대형 소나기구름이 발달한 것이다. 계곡을 따라 합류한 물길은 몇배나 덩치가 커졌고, 피서객들은 한밤중에 손 쓸 겨를 없이 돌발홍수에 당하고 말았다.
바둑을 복기하듯이 지나온 돌들을 연결해보면 인과관계의 고리가 이해되는 듯하지만, 큰 사건일수록 그 전조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게 문제다. 기록적인 엘니뇨가 지나가며 세계 곳곳에 홍수와 가뭄이 빈발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이렇다 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장마도 끝나가며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피서지로 떠났다. 지리산 자락에서 야영하던 사람들도 남풍이 불어대며 수증기 연료가 꾹꾹 채워지는 동안에는, 생사를 가르는 위험을 눈앞에 두고도 그저 찜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평범한 여름밤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재난 대비에는 가장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한 순간이라고 뒤집어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