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지난 27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동주민센터에 마련된 사전투표소에서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김경락 ㅣ전국팀장
이틀 뒤 주요 신문과 방송은 머리 뉴스로 6·1 지방선거 결과를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취지 보도를 내보낼 것이다. 개표 결과에 따라 ‘집권 여당과 정부에 대한 견제심리가 막판에 작용했다’거나 ‘새 정부에 힘을 실어주려는 민심이 정부·여당 견제론을 압도했다’는 식의 해설이다. 미디어들은 두 방향의 꼭지를 모두 준비해 놓고 개표 결과를 기다릴 수도 있겠다. 정치권이나 정치평론가들도 지방선거를 이처럼 ‘중앙의 맥락에서’ 논평하는 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는 정치권은 물론 미디어도 지방선거를 ‘중앙’ 정치를 바라보는 민심의 풍향계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용산(대통령실)과 광화문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와 여의도(여야 정당)에 대한 ‘총체적’ 민심을 읽는 수단으로써 지방선거가 기능한다는 얘기다. 이게 지방선거를 중앙이 소비하는 방식이다. ‘지방이 스스로 돌본다’는 뜻이 묻어 있는 지방자치가 다시 시작(1995년)되고 한세대를 지났지만 이름에 걸맞은 지방자치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지방이 지방선거에 소외되는 까닭은 뭘까. 땅덩어리가 좁고 사통팔달 뚫린 교통과 아이티(IT·정보기술) 인프라가 구축된 터라 한반도에선 중앙과 지방의 구분은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 ‘사람은 키워 서울로, 말은 제주로 보낸다’는 옛말처럼 한국 사람들 머리와 가슴에 ‘서울 중심성’이 깊게 뿌리박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역 일꾼을 자처하면서도 정치적 야망의 최종 목표는 중앙정치에 두는 이들이 적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다.
이뿐만일까.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 제도적인 문제점도 살펴볼 수 있다. 광역단체장은 물론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후보조차도 중앙당이 사실상 정한다. 국민경선 혹은 여론조사와 같은 외피는 두르고 있으나 시·도당에 영향력이 큰 국회의원 등 ‘여의도’ 정치인들의 선택을 받지 못한 지역 일꾼들은 선거에 명함을 내밀기 어렵다. 중앙이 자치단체 후보 선출을 쥐락펴락하며 중앙이 언제든 지역 일꾼을 동원하는 구조 속에선 지역보다 중앙의 이해관계가 앞서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하여 지역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는 중앙의 세를 불리거나 잠재적 중앙 일꾼을 훈련·양성하는 수단이 된다.
정당법은 이런 중앙 또는 서울 중심성을 강화하는 매개체다. 지역에 뿌리를 둔 ‘정치결사체’는 선거에 후보자조차 낼 수 없다. 서울에 중앙당을 두지 않은 지역정당은 불법이며, 정당으로 인정받지 못한 정치결사체가 단체명을 걸고 후보를 내면 공직선거법 위반이다. 아무리 지역 사정에 밝고 비전이 충만해도 ‘여의도 정당’ 간판을 달지 않으면 출마는 불법이 된다. 무소속 출마만이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지다.
지역정당을 허용하자는 입법 청원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됐다. 2016년엔 한국정치학회가 뜻을 모아 입법을 시도했지만(김세연·유승희 의원 소개) 국회 상임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2017년 천정배 의원 발의 안도 같은 수순을 밟았다. 입법청원 안과 발의 안에 대한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검토보고서에는 “타당성은 인정되나 군소정당 난립이란 부작용도 고려해야 한다”라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한 의견만 담겨 있다. 지역정당을 허용하고 있는 미국, 독일,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지역정당 난립 탓에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중앙당은 서울에 반드시 두게 하고(3·4조), 시·도당은 1천명 이상 당원을 확보하도록 하는(18조) 등 정당법의 해당 조항은 1960년대 초 제정 이래 50년 넘도록 손질되지 않고 있다. 대통령 직선제 등 형식적 민주주의 확장에 힘써온 민주당이나 규제를 없애 참여자 간 자유로운 경쟁을 노래하는 국민의힘 모두 정당과 정치의 서울 중심성을 강화하며 지대(rent)를 누리는 데는 한통속이었다는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중앙의 눈칫밥 먹는 지역정치인은 온전히 지역에 충실하기 어렵다. 지방은 여의도 정치인의 놀이터가 아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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