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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홍은전 칼럼] 유언을 만난 세계

등록 2022-06-05 18:39수정 2022-06-06 02:38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최정환은 3월21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2022년 출근길 지하철 바닥을 기며 장애인 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장애인 활동가의 모습과 겹쳐졌다.
지난 4월21일 아침 7시30분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독립문 방향 열차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진행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지난 4월21일 아침 7시30분께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가 서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독립문 방향 열차 바닥에 엎드려 오체투지를 진행하고 있다. 박지영 기자 jyp@hani.co.kr

홍은전 | 작가·인권 동물권 기록활동가

1995년 3월8일 밤 9시30분 불 꺼진 서초구청 앞마당에서 한 남자가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치솟은 불이 그의 몸을 활활 태운 뒤 천천히 잦아드는 동안 지켜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순찰을 돌던 당직실 직원이 뒤늦게 발견해 그를 병원으로 옮겼다. 그의 이름은 최정환. 양재역 앞에서 카세트테이프를 팔던 장애인 노점상이었다. 그날 저녁 단속반에게 압수당한 스피커와 배터리를 찾으러 구청에 갔다가 ‘병신’이란 말을 듣고 쫓겨난 뒤였다. 새카맣게 타버린 그를 본 동료는 숯덩이 속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그 목소리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복수해달라. 400만 장애인을 위해서라면 죽어도 좋다.” 최정환은 3월21일 사망했다. 그의 나이 서른여덟이었다.

그의 분신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가두시위조차 꺼릴 만큼 주춤해 있던 민중운동세력들을 다시 거리로 불러 모은 크나큰 사건이 되었다. 사람들은 문민정부가 부르짖던 ‘세계화’의 기만성이 드러났다며 김영삼 정권 퇴진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조차 장애 문제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가난했던 장애인 노점상의 삶과 죽음은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채 잊혔다. 그의 이야기는 26년이 지난 2021년 진보적 장애인 언론사 <비마이너>에 의해 복원되어 책 <유언을 만난 세계>에 기록되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목숨 걸고 저항했으나 주류 운동의 열사들과 달리 전혀 주목받지 못한 장애해방운동 열사 8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1958년에 태어난 최정환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성장했다. 고아원을 나온 뒤 스물한살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했다. 갈 곳 없는 장애인이 된 그는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시설에 들어가 살았지만 얼마 안 가 그곳을 나왔다. 얻어먹는 존재로만 살고 싶지 않았다. 최정환은 시장 바닥에서 수세미를 팔며 자기 힘으로 살았다. 다리에 고무 튜브를 끼우고 엎드린 채 하루 종일 사람들의 무릎 아래를 기어 다니는 힘든 노동이었지만 그냥 손 벌리는 게 아니라 물건을 팔아 돈을 번다는 자부심에 자신을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여길 수 있었다. 수세미에서 카세트테이프로 종목을 바꾼 뒤엔 성내역 근처에 자리를 잡고 돈도 제법 쏠쏠하게 벌었다.

1994년 최정환은 양재역 앞에 있었다. 성내역 자리는 더 어려운 장애인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새로운 상권으로 진출한 것이었다. 돈 많은 서초구는 노점상 없는 구를 만들겠다며 더 많은 용역을 고용해 노점을 단속했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나라에서 쳐들어와 좌판을 엎어버리는 통에 마음이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먹고살겠다고 카세트테이프 좀 팔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한 일인가. 벌금을 물고 압수당한 물건을 찾으러 갈 때마다 삶이 비루했다. 그럼에도 시장 바닥을 밀고 다니며 수세미를 팔았던 그답게 매일매일 용기를 내 꿋꿋이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그해 여름 단속을 당하는 과정에서 왼쪽 다리마저 부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땐 그마저도 할 수 없게 됐다.

최정환이 피해보상을 요구하자 구청은 나중에 편하게 장사하게 해줄 테니 조용히 넘어가자고 회유했다. 모아둔 돈을 3개월 입원비로 다 쓰고 퇴원한 최정환은 깁스도 풀지 못한 채 다시 노점을 폈다. 살아야 했으니까. 하지만 구청은 약속을 어기고 언제 그랬냐는 듯 또다시 불법노점이라며 그의 물건을 빼앗아갔다. 분통이 터져 병원진단서를 들고 가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움직이지 않았다. 먹고사는 일이 불법인 그는 존재 자체가 범죄였다. 돈을 벌 방법이 없는 사회에서 돈을 벌겠다고 나선 장애인은 어떻게 해도 범죄자가 될 수밖에 없다. ‘병신’들에게 허락된 노동은 구걸뿐이었다.

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불태우기로 마음먹는 어떤 밤을 생각한다. 그의 저항을 지켜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이 고통스러운 의식을 절대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처럼 느껴져 더욱 무섭고 슬프다. 고백하건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기가 버거운데 죽은 사람들의 얘기까지 꼭 들어야 할까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게 시장 바닥에 엎드려 수세미를 팔던 최정환이 기어왔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2022년 출근길 지하철 바닥을 기며 장애인 권리예산을 요구하는 장애인 활동가의 모습과 겹쳐졌다. “그건 당신들 사정이고 왜 우리가 피해를 입어야 돼요?”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죄 없는’ 시민들의 자리에 나는 앉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특권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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