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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대이야기의 시대 - 애플이 당신에게 손을 내밀 때

등록 2022-06-07 18:16수정 2022-06-08 02:36

최근 3, 4년 글방은 20, 30대 여성을 중심으로 가장 활활발발한 모임 혹은 커뮤니티다. 왜 쓸까? 곰곰 들여다보다 21세기 글쓰기 지형의 3가지 키워드를 발견하고 아하, 무릎을 쳤다. 엔(n)개의 글방이 포와 접으로 연결되어 ‘이야기 우주’를 창조해내길 희망한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궁금했다. 하미나 작가, 이길보라 작가, 양다솔 작가, 안담 작가가 운영하는 글방은 늘 만원이다. 일주일에 한 편씩 글을 써와 합평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니 글방 참가자들은 매주 글을 써와야 한다. 말이 쉬워 일주일에 한번이지, 직장도 다니고 학교도 다니며 매주 글을 쓰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최근 3, 4년 글방은 20, 30대 여성을 중심으로 가장 활활발발한 모임 혹은 커뮤니티다. 왜 쓸까? 곰곰 들여다보다 21세기 글쓰기 지형의 3가지 키워드를 발견하고 아하, 무릎을 쳤다.

글방 전성시대를 이끄는 첫번째 키워드는 아무래도 <일간 이슬아>일 것이다. ‘하루에 한 편, 한 달에 만원, 한 편에 오백원’이라는 흥미로운 카피로 메일링 구독서비스를 시작한 <일간 이슬아>는 독자와 작가의 직거래 시스템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창출해냈다. 출판사와 서점이라는 유통구조를 뛰어넘어 작가와 독자가 전면적으로 만나는 이 시스템은 짜릿하고도 위험한 거래라 할 수 있다. 글이 재미없으면 독자는 언제라도 구독을 중지할 수 있고 종종 작가에게 개입할 여지도 있다. 한편으로 문학상이나 문학지를 통한 등단이라는 기존 절차가 아니더라도 독자가 인정하고 선택하고 구매하면 작가가 되는 새로운 작가인증 시스템도 <일간 이슬아>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전문가 그룹의 심사와 승인이라는 절차의 해체는 기존 권위로부터 벗어나고, 예측을 빗나가는 새롭고 엉뚱한 글이 등장할 틈을 마련했다. 출판사 역시 안정적인 독자군을 확보하고 있는 작가를 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일간 이슬아>는 장르의 재발견에도 일조했는데 수필 혹은 에세이는 이른바 본격문학이랄 수 있는 소설이나 시에 비해 사변적인 이야기 모음집이라는 인상이 있었다. 평론가들이 굳이 비평하지 않는 장르였다고 할 수 있겠다. <일간 이슬아>는 픽션과 논픽션을 변주하고 확장하며 수필 혹은 에세이가 하나의 장르로 독자들의 지지와 관심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이 정도 글이면, 분량이나 다루는 주제 면에서, 나도 쓸 수 있겠다는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한 측면도 있다. <일간 이슬아>를 시작으로 새로운 스타일의 작가군이 탄생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그들은 사회적 관계망인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북 토크, 요가, 정치활동, 화보촬영 등 글 외에도 일상을 공유하며 작가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독자들은 <일간 이슬아>를 통해 작가와 독자가 동반성장하는 경험을 공유한다. 연애와 가족 이야기에서 출발해 비건과 사피엔스의 미래로 주어를 확장하는 작가의 글을 통해 독자들 역시 기후변화와 차별금지법과 공장식 축산과 장애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함께 고민하고 공감하고 연대한다.

둘째, ‘한국과학문학상’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작가 김초엽과 <천 개의 파랑>의 작가 천선란이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자들이다. 김초엽 작가는 여성이면서 과학자이면서 들리지 않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서 에스에프(SF)를 주로 쓰는 작가다. 이는 곧 변방의 변방의 변방에 자리 잡은 이, 라는 말일 수 있다. 에스에프 장르는 한국문학 지형도에서 마니아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주류라고는 말할 수 없는 분야였다. 화성침공도 외계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녀들의 에스에프는 한국적인, 그러니까 로컬적인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에스에프의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우주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의 얼굴이 서양인이 아닌 내 이웃의 얼굴이라는 건 신선하고도 파격적이라 할 수 있겠다. 천선란 작가는 <천 개의 파랑>에서 인간과 말과 휴머노이드(인간 모습의 로봇)의 관계를 다룬다. 두 작가는 글을 통해 생명과 생명 아닌 것,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를 묻고 있다.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았던 존재와의 교류, 소통, 사랑에 대한 질문을 하며 ‘우리’를 확장해내고 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활극을 벌이는 에스에프 세계에 좋은 여자 이상한 여자 나쁜 여자들이 대거 등장해 지구와 다른 행성을 누비는 건 기존에 없던 일이라 참신하고 설렌다. 작가는 현실을 참조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고 그 세계는 다시 현실을 바꾸어내는 데 일조한다.

세번째 키워드는 이민진 작가와 <파친코>다. 26개 언어로 번역되고 애플이 드라마로 만든 <파친코>는 일제강점기, 간토(관동)대지진, 지문날인, 조선학교 등 한반도 사람들이 겪은 특수한 역사가 보편적 서사로 전 세계적인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1세기를 관통하는 인류의 핵심 의제 중 하나는 이주와 난민이다. 지구 내에서의 이동뿐만 아니라 화성으로의 이주도 계획되고 있는 시점에서 디아스포라는 어쩌면 모두의 이야기일 수 있음을 관객과 독자들의 반응을 통해 알 수 있다. <파친코>는 몇 가지 점에서 한국과학문학상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이민진 작가는 ‘코리안 아메리칸’ ‘여성’이다. 이 말인즉슨 비주류 중의 비주류라는 이야기다. 재일조선인의 이야기 역시 비주류 중의 비주류 소재일 것이다. 여기에서 ‘낯선’ 이야기가 탄생했다. 문자의 역사는 남성, 이성애, 비장애인, 인간 중심의 이야기로 점철되어 왔다. 새로운 이야기는 그러므로 그 범주를 벗어난 곳에서 시작할 것이다. 애플이 <파친코>를 드라마로 만든 건 정의와 공정, 자유 따위에 관심이 있어서는 아닐 것이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본의 더듬이로 찾아낸 것이 ‘이야기’다. 그것도 ‘다른’ 시선으로 쓰인 ‘다른’ 이야기인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동시접속으로 볼 수 있는 오티티(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세계는 굳이 영어로 쓰인 이야기만을 원하지도 않는다. 오티티는 새로운 이야기꾼을 발굴하고자 안달이 났다. 지나간 이야기도 다시 보고 다가올 이야기도 상상해볼 대이야기의 시대에 아시아, 여성, 장애인, 동성애적 정체성은 더는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 것이다. 언어 밖의 언어를 이해하는 감수성은 인간 이외의 종과 공존해야 하는 시대에,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와 공생해야 하는 시대에, 성간(星間) 우주를 탐험해야 하는 시대에 가장 중요하고도 필요한 요소일 것이니.

그러니 쓰지 않을 이유가 무엇인가. 애플이 넷플릭스가 디즈니가 당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 시작해야 하는 이야기, 우리를 기다리는 이야기가 저토록 많은데. 글방은 향후로도 이 시대 마음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주요한 모임이 될 것이다. 엔(n)개의 글방이 포와 접으로 연결되어 ‘이야기 우주’를 창조해내길 희망한다. 인물의 서사를 넘어 만물의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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