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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구구절절한 이야기

등록 2022-06-09 18:17수정 2022-06-10 02:08

지난해 8월 전남 구례군 양정마을에 자리한 빈 집 터. 구례/김민제 기자
지난해 8월 전남 구례군 양정마을에 자리한 빈 집 터. 구례/김민제 기자

김민제 | 사회정책팀 기자

소화할 정보가 많은 취재 현장에선 용건만 간단히 말하는 게 유용하다. 말이 길어진다고 돈이 더 드는 것은 아니지만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줄기 때문이다. 취재원과 두괄식 문장을 탁구공처럼 주고받다가 기사 한편을 완성할 때도 있다. ‘말의 효율’에 집착하는 마음은 일상에서도 종종 튀어나온다. “무슨 말을 하다 여기까지 왔지?” 대화의 목적지를 잃어버린 친구에게 웃어 보일 법도 하나, 그만 본심을 드러내고 만다. “그러게. 하고 싶은 말이 뭐였어?”

어느 일터나 그렇겠지만, 특히나 효율성이 중시되는 곳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구구절절함을 터부시해왔다. 인터뷰 경험이 적은 이들은 육하원칙에 맞춰 논리적으로 사연을 말하기 어려운 게 당연한데, 취재원의 이야기가 늘어지기 시작하면 슬슬 조바심이 생겼다. 반대로 초장에 질문 의도를 파악하고 결론부터 능숙하게 말하는 이들과 대화할 땐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스스로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한 게 아닌지’ 되짚는 버릇도 생겼다.

필요한 정보만 쏙쏙 뽑아서 말하는 두괄식 대화법이 개운하기만 한 취재로 이어졌는가 묻는다면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오래 기억에 남는 취재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일 때가 많다. 두서없고 구구절절한 말이 오고 가는, 이를테면 이런 순간이다.

지난해 여름 전라남도 구례군 양정마을을 찾아 수해 피해 주민들을 만났다. 이 일대 주민 상당수가 2020년 8월8일 ‘500년에 한번 올 만한’ 폭우로 집과 소와 논과 밭을 잃었다. 수해 이후 1년이 지난 당시에도 비 오는 날이면 찾아오는 불안감과 복구되지 못한 피해로 고통을 호소했다. 재난이 남긴 상흔을 깊이 들여다보자고 다짐하며 내려갔으나, 반나절이 흐르자 취재의 효율을 따지려는 마음이 이내 고개를 들었다. 피해 주민 사례를 확보했고 수해 흔적이 남은 현장 스케치도 했겠다, 용건을 끝냈으니 떠나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해 질 무렵 마을회관에서 짐을 챙겨 기차역으로 출발하려는데 흰 승용차 한대가 회관 앞에 부랴부랴 멈춰 섰다. 운전석에서는 체구가 작은 노인이 내렸다. 아내의 지병 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느라 늦었다며 취재가 끝날까 봐 서둘러 왔다고 했다. 노인은 따로 앉을 곳을 찾지도 않은 채 승용차 앞에 서서 2020년 여름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마을 사람들도 하나둘 노인 곁으로 모여들었다.

“(수해 이후) 병이 생겨버렸어요. 어린아이가 울다 지쳐 잠들면 경기하잖아요. 이유는 몰라도 나도 종종 그래요.” “우리 집은 수해로 망가져서 아직 고치지도 못했어요. 지금도 이동식 주택에 사는데, 겨울엔 굉장히 춥더라고요.” “20년 넘게 살아온 곳이지만 그만 떠나고 싶어요. 오막살이도 좋으니까 안전지대에서 살고 싶은 마음뿐이에요.” “지금도 비만 오면 마음이 조마조마해요. 차가 물에 잠길까 봐 걱정돼서 윗마을에 주차해 놓고 내려올 때도 있고….”

재난 피해를 증언하면서 사안의 중요도를 가려가며 효율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수해 피해를 털어놓은 다른 주민들이 그러했듯, 노인의 이야기도 여러 공간과 시간을 들렀다가 왔다. 한숨 돌릴 새도 없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털어놓는 이야기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엉망이 된 터전을 복구하고 싶은 마음과 20년 넘게 살아온 마을을 떠나고 싶은 마음, 울다 지쳐 잠드는 어린아이와 경기하듯 놀라는 노인의 모습, 떨쳐내고 싶은 불안한 기억과 그럼에도 누군가에게 알려야 하는 조바심이 말속에서 포개졌다. 물난리 당시의 상황이나 피해 규모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말이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순간과 감정들이다.

간단명료함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도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빛을 발하는 순간은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하려는 말이 무엇이냐며 결론을 재촉하고 싶어질 때면 잠시 멈추고 떠올려보려고 한다. 목적지로 직진하는 말과는 다른 힘이 빙빙 돌아가는 말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을.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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