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서울 서초구 빗썸 고객센터에 가상화폐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세계적인 물가 폭등과 경기침체 우려 속에 가상자산 시장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 극복을 위해 각국 정부가 돈을 풀며 호황을 누린 가상자산이 인플레이션 앞에 맥을 못 추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가상자산 거래소인 코인베이스는 지난 14일 5000명 정규직 직원 중 18%를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테라·루나 코인 붕괴, ‘가상자산 은행’ 격인 미국 업체 셀시우스의 자금인출 중단에 이어 또 한번 가상자산 시장에 충격을 주고 있다.
가상자산의 최근 위기는 가상자산 옹호자들이 쏟아낸 장밋빛 전망을 냉정하게 점검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세계경제가 코로나19 대유행 충격에서 벗어나면서 물가가 상승하자, 가상자산 옹호자들은 비트코인이 ‘디지털 황금’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올해 들어 비트코인 가격이 폭락하며 이런 주장은 금세 무색해졌다.
비트코인과 금의 가격 흐름을 보면 둘은 비교 대상도 되지 않는다. 미국의 금 선물가격은 지난 1월 초 온스(28.35g)당 1800달러 수준이었는데, 15일에는 1819.6달러를 기록했다. 주식과 채권가치 폭락, 달러 강세 와중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금은 역시 금’임을 재확인시켜줬다.
반면 비트코인 가격은 이날 연초의 절반에 불과한 2만2000달러 수준이었다. 이런 폭락세는 비트코인이 기술기업 주식보다도 물가 상승세에 취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기술기업 주식을 대표하는 미국 나스닥지수의 이날 종가는 연초보다 30% 낮은 수준이었다.
가상자산 옹호자들의 ‘약속’이 실현되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비트코인의 처음 목표는 ‘정부의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화폐’였다. 하지만 2009년 등장한 지 13년이 지났음에도 ‘화폐’가 될 조짐은 없다. 지난해 9월 비트코인을 법정화폐로 삼은 엘살바도르에서도 비트코인은 거의 쓰이지 않는다. 지난 4월 미국 시카고대학 소속 페르난도 알바레스 등 학자 3명이 발표한 논문을 보면, 이 나라 거래의 5%만 비트코인으로 결제됐다. 논문은 신뢰 부족 때문에 주민들이 비트코인을 기피한다고 지적했다.
가상자산 옹호자들이 요즘 큰 기대를 걸고 있는 ‘탈중앙화 금융’(DeFi)도 붕괴 조짐을 보인다. 은행 등을 거치지 않고 개인끼리 가상자산으로 금융거래를 하는 탈중앙화 금융은 테라·루나 코인의 숨은 성공 비결로 꼽혔다. 두 코인은 투자자가 테라를 맡기면 최대 20%의 이자를 지급하는 ‘앵커 프로토콜’과 결합하면서 성장했지만, 지난달 초 가격 폭락과 함께 모든 시스템이 무너져내렸다.
지난 12일에는 미국의 가상자산 대출 기업인 셀시우스가 고객들의 자금인출 중단 조처를 발표했다. 이 회사는 고객이 맡긴 가상자산을 투자자들에게 빌려주는 게 주요 사업인데, 가상자산을 맡기면 최대 18% 이자를 지급했다. 높은 이자를 보장하려면 위험이 큰 곳에 투자할 수밖에 없고, 가상자산 가격이 폭락하며 유동성에 문제가 생겼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난해 말 이 회사 보유자산이 240억달러(약 30조원)였으나, 지난 5월에는 절반으로 줄었다고 보도했다.
테라·루나 붕괴와 셀시우스의 자금난은 고리대금업을 연상시키는 높은 이자로 투자자들을 끌어들여 가상자산 시장을 지탱하기도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그럼에도 가상자산 업계의 ‘천재들’은 또 다른 장밋빛 약속 거리를 만들어, 투자자들을 유혹할 것이 틀림없다. 정부의 규제를 피하는 게 최고의 혁신인 것처럼 떠들던 가상자산 업계는 최근 개인 투자자들의 손실에 책임감을 느끼는 자세부터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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