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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아저씨 저 아세요?

등록 2022-06-16 18:03수정 2022-06-17 02:36

선담은 | 정치팀 기자

“우리 정치인은 4류, 관료 행정은 3류, 기업은 2류 수준.”

열없는 얘길 하자면, 요즘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약 30년 전 발언에 위로받을 때가 있다. 이 말이 떠오른 건, 정치부로 발령 나 국민의힘을 출입하면서 처음 대화를 나눈 몇몇 정치인에게 반말을 듣고 난 뒤다. 한달여간의 경험으로는 약 10%의 정치인이 이런 태도를 보였는데, 말로만 듣던 일을 실제로 겪게 되니 황당했다. 반말을 듣다 보면 한번씩 “반말하지 마세요”라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의원님’을 붙잡고 얘기는 들어야겠으니 나는 주문(?)을 외우며 이 상황을 스스로 납득시켜야 했다. ‘그래, 정치인은 4류라고 하잖아? 내가 참자.’(물론, 나머지 90%의 정치인에겐 해당하지 않는 얘기다.)

나만 이런 불쾌감을 느꼈던 건 아닐 거다. 7년 전 새누리당을 출입했던 한 선배는 다짜고짜 기자에게 반말을 했던 김무성 당시 대표와의 일화를 기사에 언급한 적이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그 선배를 “한겨레 이○○, 일루(이리로) 와”라고 한 김 대표에게 반말투를 지적하니, “니는 왜 이름 부르는 걸 싫어하냐”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문제를 제기한 선배에게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자신의 반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취지의 말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시절 김 대표가 박근혜 대통령에게 ‘친밀한 관계’를 위해 반말을 했다는 얘긴 못 들어봤다.

상대에게 반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가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말을 놓아야 관계의 거리감을 좁힐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별로 동의가 안 된다. 언젠가 후배에게 존댓말을 하는 내게 어떤 선배는 “너는 왜 애들한테 거리를 두니?”라고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이 이상했다. 사람과 사람 간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건 반말 또는 존댓말을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다. 10대 시절부터 지금껏 내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 보면, 나이와 성별을 떠나 비슷한 고민과 가치관을 공유하는 이들과 관계가 오래 지속됐다. 그중 가장 좋아하고 가까운 친구와는 10년 넘게 서로 존대하고 있는데, 이게 불편하거나 어색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요즘 20, 30대가 선호하는 기업들이 ‘상호 존댓말 사용’을 원칙으로 하거나 이 제도를 새로 도입하려고 한다는 것 역시 같은 맥락 아닐까. 얼마 전 개인적인 모임에서 이른바 잘나가는 아이티(IT) 기업들인 ‘네카라쿠배’ 가운데 한곳에 다니는 사람들과 만났는데, 1992년에 대학에 입학한 엑스(X)세대 남성과 1993년에 태어난 엠제트(MZ)세대 여성이 아무런 위화감 없이 “○○님, ~했어요?”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봤다. 옆에서 말소리만 듣고 있으면, 누가 상급자고 하급자인지 구분이 안 됐다. 그날 습관적으로 이들의 나이와 학번을 묻고, ‘상하 관계’를 파악하려고 했던 나는 촌스러운 사람이 됐다. 국회에서 처음 보는 아저씨(혹은 아줌마)로부터 반말을 들었던 처지에선 신선하고 부러운 장면이었다.

물론, 혹자는 이런 ‘호칭 파괴’ 문화의 허구성을 지적하기도 한다. 상호 존댓말을 사용하는 조직에서도 직장 내 괴롭힘 같은 사건은 발생하며, 여전히 수직적인 의사결정 방식을 유지한 채 호칭만 ‘~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거다. 또 업무와 조직의 특성에 따라 구성원 간 존댓말 사용이 비효율을 초래할 수도 있으며, 더 나아가 수평적 조직 문화의 끝은 능력주의 강화로 귀결되는 만큼 마냥 좋아할 게 아니란 의견도 있다. 이런 비판들 역시 일정 부분 타당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국회든 기업이든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작동하는 ‘반말 본능’의 문화를 그냥 내버려두는 건 맞는 걸까. 당장 원치 않는 반말을 피할 길이 없는 나는 답답한 마음에 다음의 기사 제목을 상상해본다. “[속보] ‘존댓말 국회 만들기 3법’ ‘반말거부권 특별법’ 국회 통과” 역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이겠지만.

s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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