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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양이가 편지를 들고 왔다

등록 2022-07-04 18:20수정 2022-07-05 02:4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숨&결] 이안 | 시인·<동시마중> 편집위원

“이건 난센스 문제니까 너무 진지하지 않게, 농담처럼 가볍게 생각해 보세요. 일종의 아재개그 같은 거예요. 문제 나갑니다. 아버지 아저씨에게는 돈이 없는데 어머니 아주머니에게는 돈이 있고, 어머니보다 아주머니에게 돈이 더 많은 이유는 무얼까요?” 여기저기서 “저요, 저요!” 소리와 함께 번쩍번쩍 손이 들린다. “아버지 아저씨가 돈을 벌어 어머니 아주머니한테 갖다주기 때문에!” 첫 대답이 이렇게 나오고 뒤를 잇는 말도 비스름히 이어지는 반은 학급 분위기가 좀 진지하게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아주머니’를 칠판에 쓰고 해당하는 부분에 밑줄을 그어 가며 이렇게 읽는다. ‘아주머니’ ‘주머니’에는 ‘머니’가 ‘아주’ ‘매니’. 어린이들이 와그르르르 웃고, 점잖이 듣고 계시던 담임선생님도 활짝 웃을 때, 내가 ‘소주 만병만 주소’를 말하면 어린이들은 ‘토마토’ ‘별똥별’ ‘이슬이’ ‘나만 만나’ 같은 기초적인 회문(palindrome·팰린드롬) 구조로 이루어진 단어를 꺼내 놓는데 개중에는 ‘토 맛 토마토 대 토마토 맛 토’ 같은 최신 발명품을 알고 있는 어린이가 발견되기도 한다.

문제는 계속된다. 곰을 돌리면 문이 되고 문을 돌리면 곰이 된다. 문이 고장 나서 문 고치는 기술자를 불렀다. 그 사람이 와서 요모조모 살펴보더니 여기서는 고칠 수 없고 공장에 가져가 고쳐 와야 한다면서 문을 떼어 등에 지고 가다가 조금 쉬려고 내려놓는다는 게 그만 똑바로 아니고 거꾸로 돌려 내려놓고 말았다. 그러자 거꾸로 선 문이 곰이 되어 달아났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한글을 뒤집고 아라비아숫자를 섞어 평범한 문장에 암호를 심은 문제 ‘5륵 하륵엔 9믈2 절망 1나도 없네’(오늘 하늘엔 구름이 정말 하나도 없네)를 함께 풀며 개념화되고 제도화된 인식과 감각의 틀을 살짝살짝 흔들어 본다.

‘응’의 변신은 눈부시다. ‘토마토’가 앞에서부터 읽어도 토마토, 뒤에서부터 읽어도 토마토라면 ‘응’은 위에서부터 읽어도 응, 아래에서부터 읽어도 응이다. ‘응’을 회전시킨다. 180도 물구나무를 세우면 그대로 응이지만 90도 회전시키면? ‘공일공’(010). 45도만 회전시키면? 금세 ‘퍼센트’(%)에 도착한다. 국어책에 있는 ‘응’이 수학책에 들어가면? ‘나누기’(÷)는 ‘퍼센트’보다 조금 빠르다. 친구들 하자는 대로 늘 ‘응’ ‘응’ 호응해주던 ‘응’이 어느 날 자기를 만만히 본다고 삐쳤다. ‘흥!’

이쯤에서 가지고 간 ‘도꼬마리’ 씨앗을 꺼내 보여준다. 도꼬마리가 잘 붙을 만한 옷을 입고 온 어린이를 앞에 나오게 해 도꼬마리의 접착력에 다 같이 경탄하는 시간을 가진 다음 문제를 낸다. 이 시는 어떤 방법으로 썼을까요? 숨은 비밀을 맞혀 봅시다.

“어라?/ 도꼬마리 한 마리가 집까지 따라왔네?/ 바짓가랑이에 날름 붙어/ 어디든 달랑달랑 따라나서는 강아지/ 꼬리처럼 친구 손 꼭 잡고 라랄랄라/ 유치원을 나오는 꼬마처럼 라랄랄라/ 바짓가랑이에 착 붙어/ 나를 좀 다른 곳에/ 나를 좀 다른 곳에/ 쉬지 않고 중얼거렸을 거야/ 여기 아닌 다른 곳에/ 여기 아닌 다른 곳에/ 당근 가지 오이…… 저녁 찬거리를/ 도마에 올리며 또각또각 걸리는 아빠/ 등에 착/ 붙어 도꼬마리는,/ 도무지 안 들어줄 도리 없는 목소리로/ 아빠처럼 말하네/ “얼른 화단에 풀어 주고 와서/ 맛있는 저녁 먹자!””
(이안, ‘도꼬마리는 아빠처럼 말하네’ 전문)
※힌트. ‘도꼬마리’ 안에는 두 글자로 된 단어 다섯개가 들어 있다. 상주남부초 3학년 한정하 어린이는 동시집에서 단어 네개를 임의로 추출하여 이런 시를 썼다. “시월 꽃밭에/ 고양이가 편지를 들고 왔다/ 꽃이 예뻐서 들고 왔다/ 근데 어떻 꽃에 줄지/ 아직도 모른다”(‘고양이의 편지’ 전문) “어떻”은 잘못 쓴 게 아니다. ‘어떻게’와 ‘어떤’ 둘 다에 닿는 절묘한 표현이다. 정하가 추출한 단어 네개는 ‘편지’, ‘고양이’, ‘시월’, ‘꽃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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