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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피노체트 잔재의 힘겨운 종언

등록 2022-07-14 18:16수정 2022-07-15 02:38

지난 6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에서 시민들이 새 헌법 깃발과 칠레 국기를 들고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 6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에서 시민들이 새 헌법 깃발과 칠레 국기를 들고 흔들고 있다. AFP 연합뉴스

[통신원 칼럼] 김순배 |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칠레가 다시 고비를 맞고 있다. 지난 1년간 국민의 대표자들이 만든 새 헌법 초안이 국민투표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이다. 심각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불만 등으로 2019년 10월 일어난 대규모 시위 이후, 근본적 사회 변화를 위해서 국민투표로 제헌회의를 구성하고 초안을 작성한 사실을 고려하면, 변화의 열망을 제도적 개혁으로 실현할 기회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2021년 7월 출범한 제헌회의는 지난 4일(현지시각) 388개 항으로 이뤄진 새 헌법 초안을 제출하고 해산했다. 찬반 캠페인을 거쳐 9월4일 국민투표에서 과반수를 얻어야 통과된다. 그런데 10일 공개된 여론조사에서 반대가 53%, 찬성은 35%에 그쳤다.

기존 헌법은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 시절에 만들어져 정당성이 없었다. 의료와 교육, 연금 등 기본권 보장을 국가가 책임지도록 규정하는 대신, 국가는 선택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조적 역할에 그친다. 기본권조차 시장에 맡기는 신자유주의 모델의 뼈대라고 비판받는 이유다. 칠레 인구의 약 13%에 이르는 원주민의 권리에 대한 언급이 없고, 과도한 대통령의 권한, 국가직 공무원의 파업 금지, 군대와 경찰 관련 헌법 조항 개정에 필요한 과도한 의회 정족수 규정(재적 7분의 4) 등도 지적된다. 2005년 리카르도 라고스 대통령 때 54개 부분에 걸쳐 수정하는 등 수차례 개정했지만 근간을 바꾸지 못했다.

반면, 새로 만든 헌법은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표자에 의해서 작성돼 정당성을 확보했다. 공공 사회보장 체계를 구축해 의료, 교육, 연금 등 기본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역할을 확대했다. 원주민 권리 보장, 성평등 구현, 자연권 등 기존에 간과됐던 진보적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논란이 되고 있다.

우선, 칠레를 “다민족 국가”로 규정한 대목. 현 헌법에서 무시됐던 원주민을 칠레 구성원의 하나로 인정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강조한 결과지만, 분열을 조장한다는 거부감을 낳고 있다. 원주민들의 사법자치권도 일정 부분 인정돼, 사법체계를 위협하고 특권을 보장한다는 반발을 사고 있다.

권력 구조의 개편도 반대 세력의 우려를 낳고 있다. 200년간 운영된 상원을 2026년 폐지하는 대신, 지방분권 차원에서 각 지역의 대표로 이뤄진 지역의회를 구성하게 되는데, 하원에 권력이 집중된다는 비판이 따른다. 사유화된 물 사용권은 공공기관을 설립해서 관리하게 되는데, 기존 민간 소유자의 권리침해가 문제로 지적된다. 임신중지권 보장 등도 논란이다. 일부 중도좌파 진영에서도 이런 이유로 새 헌법에 반대하고 있다.

새 헌법에 찬성하는 쪽은 완벽하지 않지만 통과시킨 뒤 보완하자는 반면, 반대하는 세력은 기존 헌법을 고치는 게 낫다고 주장한다. 이미 보수진영에서는 현행 헌법 수정안을 제시하고 있다. 새 헌법이 거부되면, 어떤 방식으로 기존 헌법을 수정할지를 두고 심각한 대립과 혼란이 예상된다.

이런 정치적 불확실성은 칠레의 경제 위기를 키운다. 1년 전 1달러에 740페소 수준이던 칠레 페소 가치가 폭락해, 1달러에 1000페소를 웃돌고 있다. 세계적 달러 강세 속에서 주요 수출품인 구리 가격이 경기침체 우려에 따라 하락한 가운데, 페소 가치 폭락의 약 20%는 정치 불안정의 영향으로 분석되고 있다.

칠레는 1988년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 대통령의 집권을 8년간 연장하는 안을 거부해, 피노체트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했다. 9월 새 헌법 찬반 투표는 의무 투표다. 칠레 국민이 피노체트 잔재와 결별하고 신자유주의 모델을 청산할지 다시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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