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의 정담] 03 _정책의 속성
정책은 보통 문제 인식→정책(의제) 형성→정책 결정→정책 집행→정책 평가 및 환류 등 단계를 거친다. 실은 이들 하나하나 단계마다 정치가 작동한다. 정치생태계 속 수많은 직간접 정책참여자들의 힘과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정책의제 설정은 누구에게는 넘기 쉬운 문지방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다. 정책 결정을 둘러싼 숱한 질문의 제대로 된 답을 구하려면, 정책이 초기 단계부터 갖는 이런 정치적 속성을 직시해야 한다.
세상은 늘 문제투성이다. 이 가운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사회문제가 많다. 요즘 인플레이션이 딱 그렇다. 가난한 사람들은 고물가에 고금리까지 겹쳐 하루하루가 힘겹다. 정상적인 정부라면 결코 수수방관할 수 없다. 서둘러 처방(정책)을 마련해 고통을 덜어주는 문제 해결에 힘써야 한다. 정부, 나아가 정치의 존재 이유는 이처럼 문제 해결에 있다.
여러 사회문제 가운데 정부가 해결하기 위해 나선 문제나 어젠다를 ‘정책의제’라고 칭한다. “다수의 사회문제 중에서 정책결정자들이 무엇인가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거나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한 일련의 문제 목록”이다. 시민 삶의 질과 안전 그리고 미래는, 정부가 어떤 문제를 우선 정책의제로 채택해 문제 해결에 힘쓰냐는 것과 직결돼 있다.
사회문제가 모두 정책의제가 되는 게 아니다. 정책의제가 되기 위해선 그 사안에 인적·물적 자원, 즉 조직과 예산을 투입할지 논의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좁게는 의제 설정, 넓게는 ‘정책의제 형성’ 단계다. 정책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수 과정이며, 사회문제 해결 요구가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정책은 이 과정을 거쳐야 제도화에 이를 수 있다.
정책의제 형성은 정책이 지닌 속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특정 집단 혹은 개인이 온갖 법석을 떨어도 정책의제에 오르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장애인과 노숙인 등 힘없는 사회적 약자나 제 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은 아동이나 청소년 문제가 유독 그랬다. 지난 2001년 오이도역 참사 이래 2002년 발산역, 2003년 송내역, 2004년 부천역과 이수역, 2006년 신연수역, 2008년 화서역, 2009년 제물포역, 2017년 신길역, 그리고 2022년 양천향교역에 이르기까지 사망 사고가 이어졌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는 21년째 반복된다. 지금도 한 장애인 단체가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내세우며 지하철역에서 절규하지만, 의미 있는 응답은 아직 없다.
반면 집요한 요구나 여론과 같은 사회적 압력이 없는데도 선거 과정에서 또는 정권 핵심부나 관료 등에 의해 손쉽게 정책의제로 채택된 사례도 부단히 접한다. 도대체 정책의제 형성에는 어떤 힘과 변수가 작동하는가? 왜 어떤 문제는 손쉽게 정책의제가 되고, 다른 문제는 그러지 못할까?
정책의제 형성은 “어떤 주체, 곧 결정자가 우월적 힘으로 정의하고 구성하는 것”이란 점에 그 답이 있다. 정책에 개입하는 직간접 영향자가 어떤 ‘문제시되는 상황’을 하나의 정책의제로 정의하고 해결하겠다고 나설 때, 사회문제는 비로소 정책의제로 전환된다. 달리 말하면 ‘정책영향자가 특정 문제를 정책의제로 정의해 채택하지 않으면 어떤 사회문제도 그냥 문제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대중과 여론의 관심을 끌긴 하지만 어떤 힘으로 통제돼 정책의제로 채택되지 못하고 무시되는 문제나 요구를 학계에서는 ‘억압된 이슈’ 또는 ‘없는 이슈’(non-issue)라고 부른다. 권위주의 시대의 통일 및 노동 이슈가 그랬다. 불평등과 양극화, 불안정한 노동시장, 생태위기 등 여러 사회문제도 한동안 우리 사회에서 ‘억압된 이슈’였고, 지금도 문제 해결의 뚜렷한 진전이 없다. 이들 이슈는 문제가 덜 심각하거나 해소된 게 아니다. 단지 정책영향자들이 어떤 의도로 이를 정책의제로 삼지 않아 방치됐을 뿐이다.
정책은 보통 문제 인식→정책(의제) 형성→정책 결정→정책 집행→정책 평가 및 환류 등 단계를 거친다. 실은 이들 하나하나 단계마다 정치가 작동한다. 정치생태계 속 수많은 직간접 정책참여자들의 힘과 권력관계가 작동한다. 정책의제 설정은 누구에게는 넘기 쉬운 문지방이지만 다른 누구에게는 결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다. 정책 결정을 둘러싼 숱한 질문의 제대로 된 답을 구하려면, 정책이 초기 단계부터 갖는 이런 정치적 속성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의제 형성과 결정에는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과 그 비서실, 그리고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각 부처 관료가 예나 지금이나 막강한 힘을 행사한다. 입법부인 국회와 사법부, 대학교수나 연구자 등 정책전문가,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 시민단체와 각종 이익집단, 언론 그리고 유권자 등이 영향력을 달리하며 참여한다. 하지만 의제 설정부터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절대 동등하지 않다. 정책은 이들 직간접 정책영향자들 사이의 권력관계와 상호작용의 결과다. 학자들이 정책의 산물인 제도를 두고서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화석화한 흔적’이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런 속성을 두고 하는 풀이다.
정책의 이런 속성은 “정책은 근본적으로 정치”임을 확인해준다. 한마디로 정책은 정치다. 특히 자원을 재분배하는 성격이 강한 사회정책의 경우에는 태생적으로 그랬다. 사회보장제도의 효시 격인 독일의 사회보험 도입은 19세기 말 비스마르크로 상징되는 당시 지배 엘리트의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위험 요소인 독일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활동을 잠재우기 위한 당근책이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세력인 신흥자본가 계급을 노동자 세력으로 견제하기 위한 의도도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의료보험을 도입한 배경도 다르지 않았다. 박정희 정권은 1963년 느닷없이 의료보험법 제정에 나섰다. 하지만 사회보험의 요건인 가입의 강제조항을 넣지 않아 실질적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실질적 시행은 14년 뒤인 1977년에야 이뤄졌다. 그 배경에는 박 전 대통령의 의지도 있었지만, 정치적 요인도 컸다. 유신체제란 정당화할 수 없는 장기집권 체제 아래서 일반 시민과 노동자를 달래기 위한 ‘당근’이 필요했다. 전문가들은 여기에 남북한 사이 체제경쟁을 또 하나의 요인으로 든다. 북한이 당시 남한의 빈약한 사회복지 체제를 공격하자 이에 자극받아 도입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정치와 정책의 관계는 용어에서도 잘 드러난다. 영어권에서는 정치(politics)와 정책(policy)이 구분돼 쓰이지만 독일어(Politik)는 한 단어다. 문맥에 따라 때로는 정치, 때로는 정책으로 풀이한다.
정책의제의 이런 성격은, 특히 자원을 재분배하는 사회정책 의제의 경우에는 형성 단계부터 정책영향자나 이해관계자들 사이 갈등과 대립을 불러올 여지가 다분하다. 특정 정책이 제도화할 경우, 누군가는 이익을 보고 다른 누군가는 손해 볼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1996년 한약 분쟁, 2000년 의약분업 등 이익집단들이 벌이는 복지정치는 정책이 결코 가치중립적이 아님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렇기에 정책은 공장에서 제품 찍어내듯 단숨에 마련하기 쉽지 않고 타협과 숙의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이처럼 정책 과정에는 다양한 정책행위자들의 입김과 행동, 즉 정치가 작동하기에 권력자 또는 정치적 영향력이 센 쪽이 정책의제 형성 초기부터 주도하기 십상이다. 좋은 민주주의와 바람직한 정치의 요체는 정책의제 형성에서부터 최종 결정에 이르기까지, 힘센 쪽의 일방통행이 아닌 사회적 약자와 일반 시민의 목소리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고루 반영되고, 나아가 그들이 의사결정의 주체로서 얼마나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기실 정치와 정책의 관계는 동태적이다. 정책의제는 정치에 의해서 형성되지만, 정책은 집행 이후 역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친다. 정치가 정책을 낳지만, 거꾸로 정책이 새로운 정치를 낳는다. 하나의 정책이 새로 집행되면 관련 국가기관의 역량이 변형 내지 강화된다(시다 스코치폴). 정책 집행은 그와 관련된 이익집단의 정치에 직접 영향을 주기도 한다(폴 피어슨).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정치를 창출한다(엘머 에릭 샤트슈나이더). ‘정책과 정치의 동학’이다. 정책이라는 구체적 대안 없이 정치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없듯이,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서는 어떤 이념과 가치, 정책도 현실화할 수 없다.
이창곤 |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사회정책 박사.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회정책 이슈에 관심이 많다. 기동취재팀장, 지역편집장(전국부장), 부국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장 등을 지냈다. 특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을 역임하면서 불평등, 복지국가, 생태위기 등을 우리 시대 핵심 이슈로 의제화하고자 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불평등 한국, 복지국가를 꿈꾸다>(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goni@hani.co.kr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오른쪽 넷째)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2022년 3월28일 서울 중구 지하철 3호선 충무로역에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장애인 권리예산 반영 요구 시위인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에 참여한 뒤 승강장에서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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