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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창곤의 정담] 정책생태계의 고장 난 ‘민주주의의 신호등’

등록 2023-12-19 18:56수정 2023-12-20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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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이 언론 보도를 예의주시하거나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배경도 언론의 논조에 따라 정책의 성패는 물론 정권 (재)창출이 달린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책을 둘러싼 언론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정책행위자로서 언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총체적 탐색은 태부족하다.

박민 한국방송(KBS) 사장이 지난 11월14일 서울 여의도 KBS아트홀에서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임원진과 함께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민 한국방송(KBS) 사장이 지난 11월14일 서울 여의도 KBS아트홀에서 열린 대국민 기자회견에서 임원진과 함께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추락하는 언론, 날개가 있을까.’

대한민국 언론을 떠올리면 반사적으로 솟구치는 물음이다. 현장에서 직면하는 오늘의 언론 현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참담함, 그 자체다. 1991년 언론인 김중배(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는 동아일보를 떠나면서 동료 기자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권력보다 더 원천적이고 영구적인 도전의 세력에 맞서게 됐습니다. (…)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권력은 자본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예언적 경종은 현실이 됐다. 돈의 힘에 아첨하고 굴종하는 ‘언론의 자본 종속화’는 나날이 심화했다. 부정적 기사를 관리하기 위한 광고, 협찬, 후원으로 맺어진 대기업과의 비정상적 ‘보험관계’에서 자유로운 주류 언론사가 있는가.

권력의 압박과 통제 기도 또한 사라진 게 아니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정치권력의 행태가 여전한 가운데, 한국방송(KBS) 사장이 취임 직후 자신을 간택해 준 ‘용와대’에 응답하듯 기자들의 보도에 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잘못했다며 사과하고, 검찰이 가짜뉴스와 명예훼손을 앞세워 언론사 뉴스룸과 기자들의 주거지를 압수수색하는 만행까지 보는 마당이다.

어디 이뿐인가. 선호하는 정치세력엔 우호적이고 그렇지 않은 세력엔 적대적인 ‘정치병행성 정파보도’, 소셜미디어 이용자가 편향된 정보에 갇히는 ‘필터 버블’, 가짜뉴스의 횡행과 역설, 디지털에 이어 인공지능으로 급변하는 기술환경 변화, 비난과 혐오로 공론장을 교란하는 숱한 온라인 유사언론, 독자의 불신과 확증편향적 소비…. 열거하기 숨 가쁠 정도의 숱한 요인들이 한국 언론을 전방위적으로 옥죄고 있다.

언론학자들은 일찍이 한국 언론은 유례없는 복합위기에 놓여있다고 진단했다. 어쩌면 위기란 말조차 식상하다. 기실, 많은 위기 요인은 자초한 것인데도 위기론은 언론사는 물론 언론인들의 통감은커녕 성찰의 변조차 오롯이 끌어내지 못한다. 곧은 펜으로 세상을 바꾸겠다는 뭇 언론인의 초심은 갖은 풍진에 조각나 산산이 흩어진 지 오래며, ‘노병’은 생기 잃은 눈과 메마른 관성으로 그저 끝 모를 추락을 지켜보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이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두려운 것은 언론의 위기보다 그 영향과 후과다. 이들 위기는 ‘저널리즘’을 뒤흔들고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저널리즘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전하고 ‘최선의 진실’에 추구하는 것이다. 언론의 기본원칙이자 본질이다. 그런데 저널리즘이 뒤틀리면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탈진실’과 ‘개소리’가 사실을 비틀고 진실을 능멸하는 상황이 속출한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민주주의 위기와 직결된다. 위기를 예사롭게 볼 수 없는 이유다. 미국의 저널리즘 학자 제임스 캐리는 “저널리즘과 민주주의는 한 몸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언론이 자유롭지 않거나 자유롭다 해도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면 정치체제가 제대로 돌아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뜻”(이재경 이화여대 교수)이다. 모름지기 언론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도록 도와주는 신호등”으로서 중요한 존재 의의가 있다. 단언컨대, 작금의 한국 민주주의의 퇴행 또한 언론 때문만은 아니지만, 언론의 위기, 곧 저널리즘의 위기와 긴밀히 맞닿아 있다.

다소 길게 언급한 오늘의 언론과 저널리즘의 위기에 대한 진단은 필자만의 자의적 판단이 아니다. 숱한 언론학자나 전문가들이 숱하게 다뤘지만, 그런 일부의 고군분투에도 본질에서는 달라진 게 없을 뿐이다.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이런 학계의 명료한 진단에도 언론의 실제 활동에 견줘 중요한 대목을 짚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필자가 이 연재 칼럼에서 주목해 온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에 중요한 정책행위자로서 언론의 역할과 영향, 나아가 정부 정책결정자들과의 정책보도를 둘러싼 정책의 상호관계 등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언론은 보도와 논평 등 고유 활동을 통해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을 일상적으로 전하는 한편 시민을 대신해 정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을 감시한다. 언론은 이런 감시자로서 역할을 넘어 시민이 고통받는 절박한 문제를 이슈화, 공론화함으로써 언론의제를 정부·정치권이 정책의제로 받아들이게끔 하며, 나아가 기존 정책에도 메스를 수시로 들이댄다. 정책의제 제기자, 비판자로서 언론의 모습이다.

국가의 역할이 날로 커지는 오늘인 만큼, 각 행정부처는 하루가 멀다고 각종 정책을 보도자료란 이름으로 내민다. 이들 정책을 두고 언론은 나름의 잣대로 판단해 수위와 논조를 결정해 보도하고 논평한다. 이런 언론의 고유 활동은 정부 정책의 내용과 성과가 시민의 행복 또는 불행과 잇닿아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역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이 언론 보도를 예의주시하거나 언론을 장악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배경도 언론의 논조에 따라 정책의 성패는 물론 정권 (재)창출이 달린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이처럼 정책을 둘러싼 언론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음에도 ‘정책행위자로서 언론’에 대한 우리 사회의 총체적 탐색은 태부족하다.

한국 언론은 노동과 복지, 부동산 등 각 경제사회 분야의 주요 정책에 어떤 관점과 프레임으로 보도와 논평을 하고 있는가? 그 품질은 적절하고 불편부당하며 균형적인가? 정책에 대한 언론보도와 논평은 정부의 정책의제 채택과 정책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역대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어떻게 언론을 인식하고 또 정책에 우호적 지지를 어떻게 끌어내고자 했는가? 시민은 삶에 직간접 영향을 끼치는 언론의 정책보도와 논평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거나 거부하는가? 보도와 논평 외에 언론사의 정책개입 행위는 어떤 양태로 전개되는가? 무엇보다 ‘비판과 냉소’를 넘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언론의 정책보도와 논평을 이루기 위해선 어떤 조건과 변화가 요구되는가?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의 정책행위자로서 언론의 역할과 영향을 따지는 이들 물음은 앞서 강조한 민주주의와 저널리즘 위기의 상관성 측면에서도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대목이지만 충분한 검토와 답변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약하나마 노동정책과 부동산 분야에서는 몇몇 연구자들에 의해 정책행위자로서 언론의 실체가 일부 확인됐다. 이 가운데 특히 부동산 정책을 둘러싼 언론의 모습은 정책생태계에서 언론이 어떻게 파당적 정책행위자로 기능하는지, 어떻게 정책 감시자이자 비판자란 고유의 기능을 일그러뜨리고 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이 운영하는 뉴스검색서비스(빅카인즈)에 접속해 2019년 12월부터 1년간 ‘부동산’이란 열쇳말로 검색해 보았다. 정부 부동산 정책을 두고서 많은 논란이 인 시기다. 무려 11만여건의 기사가 쏟아졌다. 하루에 300건 이상 기사가 출고된 셈인데, 한마디로 과하다. 지금은 당시에 견줘 많이 줄었지만, 부동산은 여전히 언론이 애용하는 메뉴 중 하나다. 왜 이렇게 부동산 보도가 유독 과다할까?

시민의 관심이 많다는, 즉 폭발성 있는 이슈인데다 정부의 정책 실패도 한 원인이었을 테다. 하지만 그 이면엔 일부 언론이 적대적인 정부에 대한 시민의 불만을 조직화하는데 부동산만한 호재가 없었다는 사실도 자리하고 있다. 왜 유독 진보 정부에서 부동산 보도가 급증했을까? 이들 집권 시기 집값이 크게 올랐다는 사실만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보도와 논평이 수두룩했다.

부동산은 실상 언론사들의 기업적 이해관계와도 깊숙이 맞물려 있다. 예컨대 종이신문 등 전통 미디어의 영향력은 예전 같지 않지만, 이들 매체에서 부동산 광고는 여전히 비중 있는 수입원이다. 몇몇 주요 중앙일간지는 숫제 부동산 관련 플랫폼을 설립해 관련 수익사업을 벌이고 있다. 부동산 비즈니스를 하는 언론사가 과연 부동산 정책의 공정한 비판자와 감시자로서 역할을 온전히 해낼 수 있을까. 한 경제지는 자사 소유 빌딩이 있는 지역의 장밋빛 부동산시장 전망 기사를 자주 내보내 소속 기자들 사이에서도 ‘너무한 것 아니냐’는 말이 회자하기도 했다. 이런 것이야말로 저널리즘 위기가 어디서 오는지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라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창곤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복지를 중심으로 노동, 주거, 환경 등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수적인 요소와 정책에 특별한 관심을 쏟는다. 대한민국 정책생태계와 복지정치의 혁신 없이는 좋은 복지국가도, 질 높은 민주주의도 이뤄낼 수 없다는 생각에 정책 행위자를 탐구하는 이 연재칼럼 집필에 매진한다.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과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상임이사를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복지국가를 만든 사람들’, ‘복지의 문법’(공저), ‘성공한 나라 불안한 시민’(공저) 등이 있다.

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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