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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투쟁이 소용없다 말하지 말라

등록 2022-07-25 18:39수정 2022-07-26 02:38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23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앞에서 열린 ‘7·23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문화제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조합원들이 지난 23일 오후 경남 거제시 아주동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 서문 앞에서 열린 ‘7·23 대우조선 하청노동자 희망버스' 문화제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숨&결] 이주희ㅣ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연세대 학생이 하청 청소노동자 시위에 대해 정신적 손해배상 등을 사유로 소송했다는 보도가 잊히기도 전에,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의 파업에 대해 사쪽이 손해배상소송을 하겠다고 한다. 공정과 상식을 입에 달고 법과 원칙을 너무나 추앙하는 대통령과 관련부처 장관들은 이를 지지하며 불법 파업에 대한 강력 대응 의지를 밝혔다.

그런데 왜 불법 파업인가? 우리 노동법은 사업장 점거 파업을 금지하지 않으며, 불과 2년 전에 대법원은 하청업체 노동자가 원청을 점거하고 파업해도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마치 대통령실 사적 채용 논란이 김영란법 위반인가 아닌가로 의견이 갈리는 것처럼 이 역시 법적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노동시장에서의 수요와 공급은 상품시장과 같은 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상품으로서의 노동은 그 판매자의 사회적 삶과 분리될 수 없으므로 가격, 즉 임금이 하락할 때 더 심한 경쟁이 유발되며 이러한 비대칭성하에서 ‘자유’로운 고용계약이란 형식상 존재할 뿐 실재하지 않는다. 불법 여부의 판정에서 노동법이 하청노동자의 실질적인 임금 결정 능력을 가진 원청업체에 공동사용자 책임을 부여하지 않아 이런 방법으로밖에 자신의 노동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리고 공동사용자 책임은 꼭 법적으로 부여되어야 하는 정의이다.

사쪽이 주장하는 8000억원에 이르는 파업으로 인한 손실액의 근거도 의심스럽다. 컨베이어벨트식 생산이 이루어지는 경우 파업으로 제품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소비자가 대체 상품으로 이탈할 수 있으나 배는 주문제작으로 적어도 1년 이상의 제작 기간을 가진다. 이러한 생산방식에서는 사쪽이 파업으로 인한 손실을 시간외근무 확대 등으로 쉽게 회복할 수 있는 만큼 만일 소송이 진행된다면 손실액과 관련된 명확한 증거자료 제시가 필요할 것이다. 최저임금을 조금 넘는 수준의 보수를 받는 노동자에게 수십, 수백억원의 손해배상은 사법정의의 실현이 아니라 노동자를 자살로 몰아가는 노조 죽이기의 또 다른 방법일 뿐이다. 좋은 인디언은 죽은 인디언뿐인 것처럼, 좋은 노조는 죽은 노조뿐이라는 영미권 국가의 노조 혐오는 노사관계의 사법화를 불러왔다. 노조활동에 대한 손배소의 남용은 가장 기본적인 노사자치의 원칙을 무시하는 사법화로서, 이미 구조적으로 우위에 있는 단체교섭의 당사자, 즉 사용자에게 법을 사적으로 유용할 기회까지 제공할 수 있다.

2000년대 초반 도쿄대 법대에서 열린 한 국제회의에서 일본 노사 대표의 토론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동시통역기의 성능을 의심하며 발화자의 소속을 여러번 확인해야 했는데, 노총 간부는 경기침체 시기 사용자의 어려움에 대한 격한 공감으로, 경영자단체 임원은 노동자의 힘든 생계 걱정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구조적인 힘의 불균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의 동의와 협력은 강제와 강압의 바다에 둘러싸인 흔들리는 배에 불과하다. 일본 노조는 강력했던 춘투의 전통을 버리고 수십년간 양보 교섭을 거듭한 끝에 심지어 마이너스 임금성장률까지도 받아들였고, 그 결과 구매력 부족과 혁신의 부재로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30년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 데 크게 기여했다. 기획재정부는 임금 인상 자제를 주장하기 전에 일본 경제의 문제점을 다시 들여다보기 바란다.

하청노동자의 지켜보기조차 힘든 싸움을 봐야 할 때마다, 정신적 손해배상은 가장 힘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형해화를 묵인하고 방조하는 국가에 청구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없는 나는 고작 1848년 영국 노동자계급의 선거권 획득 투쟁이 실패한 직후 나온 아서 휴 클러프의 시를 떠올릴 뿐이다. ‘투쟁이 소용없다 말하지 말라. 고난과 상처가 부질없으며, 적은 약해지지도 쓰러지지도 않으며, 여전히 세상은 그대로일 것이라 말하지 말라. 헛되이 부서지는 지친 파도는, 결국은 거대한 대양을 이루고, 너무나 천천히 떠오르는 태양에도, 서쪽 대지는 환하게 밝아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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