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폭우 뒤 맑게 갠 하늘의 모습. 연합뉴스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매일 겪은 날씨가 겹치고 겹쳐, 기억 속에 침전된 날씨 스크랩북은 여러장의 사진을 한데 포개놓은 것처럼 복잡하다. 강한 인상을 남긴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대개는 날씨가 돌변해 깜짝 놀랐다든가, 날씨 때문에 힘들었던 사연들이다. 장대비가 내린 날 개울가에 불어난 물살이 성난 모습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넋 잃고 바라본 거라든지, 뙤약볕에서 몇시간이고 행군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던 일들이 떠오른다. 그 와중에 섞여 들어간 평탄한 날씨는 좀처럼 기억해내기 어렵다. 이것들은 색깔이 없고 특이한 인상도 없다. 익숙해진 습관처럼 무의식 속에 박혀 있다. 하지만 비바람이 몰아치고 천둥소리가 들려오면, 평탄한 날씨의 희미한 인상이 수면 위로 올라온다. 그러면서 고향에서나 느낌 직한 어머니 품속의 포근함이 그리워진다.
북태평양고기압 가장자리를 따라 수증기의 물길이 밀려오면, 먹구름이 지나는 곳마다 강한 비가 쏟아지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이것들은 일렬종대로 전진하다가도, 갑자기 정체하기도 하고 럭비공처럼 건너뛰며 지나는 곳마다 큰 상처를 남긴다. 이번 여름에는 강우 집중도가 유난히 높았다. 인천-서울 강남-양평으로 이어진 강우벨트를 따라 12시간 동안 300㎜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동작구에선 시간당 140㎜로 강우 기록을 새로 썼다.
호우 비상상황은 종종 하루를 훌쩍 넘겨 며칠이고 이어진다. 레이더에 강우 시그널이 포착되면, 예보실에서는 강한 비구름대를 추적하느라 정신이 없다. 방재 유관기관과 수시로 연락하며 비구름의 동태를 알려, 저지대 주민을 대피하게 하거나 침수 도로를 통제하도록 돕는다. 콩 볶듯이 날씨에 따라 춤추다 보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모두 지친다. 밤을 꼴딱 새우는 바람에 정신이 몽롱하다. 그러나 아무리 긴 터널도 끝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 기나긴 폭우와의 전쟁도 휴식기에 들어간다. 한반도에 들어찬 수증기가 비로 소진되자 먹구름도 잠시 주춤해진다. 가려진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실오라기 같은 하늘색이 묻어난다. 호우특보가 해제되자 귀가를 서두른다. 한동안 옷을 갈아입지 못해, 몸에서는 꾀죄죄한 냄새가 난다. 북쪽의 서늘한 공기가 잠시 남하하며 바람에 살랑이자 갑자기 가을이 온 듯 상쾌하다. 도중에 저녁놀이라도 마주치면, 잠깐 찾아온 평화가 한없이 아늑하다.
평탄한 날씨가 없다면 험궂은 날씨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폭풍우가 몰려와 모진 바람과 세찬 비를 맞아도, 시간이 지나면 바람이 잦아들고 햇살이 비치면서 삶은 그럭저럭 이어진다. 평이한 날씨는 협주곡의 2악장 같은 것이다. 안단테의 느린 박자에 맞춰 고요하고 정적인 선율이 흐른다. 그 평온함이 다른 악장의 빠른 템포와 격렬하고 거친 선율과 균형추를 잡아준다. 언제라도 마음의 고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충만함이 힘든 시간을 버텨내는 회복력을 준다.
세계 각지를 수도 없이 다녀본 여행수필가 피코 아이어는 누구보다 동적인 생활이 주는 감흥을 잘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런 그가 역설적으로 정적인 휴식을 강조한다. 빡빡한 일정표에 따라 가까스로 여정을 마무리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청하는 순간 여행의 묘미가 새록새록 느껴진단다. 바쁘게 돌아다니며 느꼈던 진기한 경험도 가만히 정지해 있을 때 비로소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한다. 날씨도 마찬가지다. 때론 어둡고 때론 사납고 때론 거칠게 대지를 몰아세우던 폭풍우도, 맑은 날씨의 평온함을 맞은 뒤에야 자연 리듬의 한 본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앞으로 걸어나가기 위해서는 한발을 뻗는 동안 다른 발은 대지 위에 잠시 딛고 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과 멈추는 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