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하철 2호선 신당역 화장실 들머리에 16일 낮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숨&결] 박성민 | 전 청와대 청년비서관
신당역 추모공간에 다녀왔다. 구겨진 노란색 메모지가 여러장 내 손에 들려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고 적고 왔지만, 그 말을 적기까지 여러장의 메모지가 필요했다. 집에 돌아와 구겨진 메모지를 다시 펼쳐보니, 쓰다 만 문장과 사정없이 흔들린 채 나열된 자음과 모음들은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은 감정이 내 안에서 일렁였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같은 여성으로서, 한 사회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정치하겠다고 나선 사람으로서 내가 가진 모든 정체성이 피해자의 죽음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들끓던 감정은 분노를 넘어선 슬픔이었고, 슬픔이란 말로는 부족한 비통함이었다. 미안함보단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기에, 공허하게만 느껴지던 죄송하다는 말은 차마 적지 못했다.
조용히 추모를 마치고 빠져나가려는 찰나, 한 기자가 나를 붙잡았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메시지를 듣고 싶다고 했다. 기자는 물었다. 어떤 마음으로 추모했냐, 정치인으로서 이번 사건을 보며 무엇을 느꼈냐…. 나는 “지킬 수 있었고, 지켜야 하는 목숨이었는데 지키지 못했다. 정치권과 사법부의 책임이 크다”고 답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그 대답을 곱씹고 있다. 분명 지킬 수 있었는데 우리는 왜 지키지 못했을까.
죽음에 의존하는 정치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정치가 돼야 하는데,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야 다급히 움직이는 ‘뒷북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신당역 사건이 일어나자 대통령, 법무부, 검찰, 경찰, 국회까지 모두 나섰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강조해왔던 윤석열 대통령은 스토킹 방지법 보완을 지시했다. 대통령 지시 3시간 만에 법무부는 스토킹처벌법의 반의사불벌죄 규정을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스토킹 전담 검사 긴급 화상회의를 열어 스토킹 범죄 엄정 대응을 지시했다. 윤희근 경찰청장도 긴급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국회는 5개월간 계류돼 있던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을 부랴부랴 소관 상임위에 상정했다. 형량 강화도 논의될 예정이다.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은 환영할 일이지만 ‘왜 이제서야’라는 씁쓸함은 더 크다. 법과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할 기회가 그동안 여러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 12월 스토킹처벌법 제정 논의 당시 정부안에는 피해자가 원하지 않으면 처벌하지 않는 반의사불벌죄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법 제정 직전인 지난해 3월 법제사법위에서 일부 의원들이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삭제해야 한다고 지적했지만, 법무부는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결국 반의사불벌죄 조항은 그대로 남겨진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부안에서 반의사불벌죄 조항을 두지 않았거나, 국회 논의 과정에서 삭제됐다면 스토킹 범죄로 고통받는 이들을 조금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지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이 있어야만 움직이는 게 이번뿐일까. 지난달 집중호우로 서울 신림동 반지하에 살던 일가족 세명이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윤 대통령이 뒤늦게나마 침수 피해 현장을 찾았고, 서울시는 반지하 주거공간을 없애나가겠다고 발표했다. 국토교통부도 반지하 가구 이주대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지하·반지하 가구 이주에 필수인 공공임대 관련 내년 예산은 줄었다. 심지어 한덕수 국무총리는 19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반지하 주민들의 주거대책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는 이탄희 의원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최근 ‘수원 세모녀 사망’ 사건과 광주 자립준비청년들의 극단적 선택 때도 그랬다. 정부는 그제야 복지 사각지대 개선책 수립을 목표로 전담팀을 꾸렸다. 의미 있는 결과가 도출되길 바라지만, 이슈가 불거지면 주목하고 관심이 사라지면 흐지부지되는 일이 반복될까 벌써 걱정이 앞선다.
이렇게 누군가 죽은 뒤에야 움직이는 정치와 행정은 무력하다 못해 무능하다. 너무 늦은 정의가 정의가 아니라는 말처럼, 너무 늦은 정치도 정치가 아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