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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폭풍 너머에는

등록 2022-10-02 17:51수정 2022-10-03 02:35

영화 <오즈의 마법사: 돌아온 도로시>(2015) 스틸컷. BoXoo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오즈의 마법사: 돌아온 도로시>(2015) 스틸컷. BoXoo엔터테인먼트 제공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고 비나 눈이 오는 것은 태양이 지구를 비추고 있어서다. 지구 위의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대기도 햇빛의 힘으로 움직인다. 대기는 햇빛을 직접 소화할 능력이 거의 없다. 땅이나 바다가 햇빛을 받아 만들어낸 열에너지를 받아 쓴다. 땅과 바다가 쉬지 않고 일을 해서 대기를 먹여 살리는 것이다.

에너지를 제공한 것은 햇빛이지만, 대기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 땅의 태생적 다양성이다. 대기층을 통과한 햇빛은 땅과 바다에 고루 내리쬔다. 하지만 지형에 따라 위도에 따라 햇빛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천차만별이라서, 지역별로 대기가 표면으로부터 받는 열과 수증기량은 크게 다르다. 똑같은 햇볕이 내리쫴도 맨땅 위의 대기는 빠르게 더워지고 수분이 빠져나가 건조해지지만, 호숫가 초지 위의 대기는 기온이 더디게 오르고 대신 수증기를 많이 받아 습윤해진다. 지역 특성에 따라 그 위에 머무는 대기의 기온과 습도가 달라지고 이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기가 꿈틀댄다. 두개의 판이 다가서면 어느 순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진이 나듯, 온습한 기운과 한랭한 기운이 맞부딪히면서 폭풍이 인다.

폭풍우 안에 갇혀 있을 때와 밖에서 바라볼 때의 느낌은 천양지차다. 단신으로 요트를 타고 세계일주에 나선 웹 차일스의 체험담처럼, 작은 돛배에 의지해 폭풍우 속을 지나간다고 상상해보라. 먹구름으로 덮여 사방은 캄캄하다. 돛은 찢어져 강풍에 배는 이리저리 휩쓸린다. 세찬 비로 배 안은 물로 가득 차 양동이로 퍼내도 끝이 없다. 성난 파도에 배는 요동치고 속은 메슥거려 몇번이나 토해낸다. 식욕도 없다. 일분일초가 하루처럼 길게 느껴지고, 목전의 위험을 피하는 데 급급해 그 너머에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해를 등지고 멀리 물러가는 폭풍우의 뒷자락에서, 구름이 햇빛에 산란하며 은은한 황금빛으로 밝아오는 걸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앳된 소녀처럼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며 노래할지도 모른다. “무지개 너머 어딘가에 하늘은 푸르고 당신의 꿈이 이루어지는 곳.” 캔자스 시골에서 쳇바퀴 도는 일상에 갇혀 있던 도로시는 다가오는 폭풍우에 몸을 맡기고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올라가, 용기와 지혜와 따뜻한 마음을 시험하는 모험이 기다리는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무지개가 뜨면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매일 보던 낯익은 건물이며 들판이며 도로이건만, 하늘에 드리운 형형색색의 구름다리 아래 들어서면 새로 단장한 풍경화가 돼 나온다. 한때 구름 안에서 자유분방하고 무질서하게 서로 부딪히고 쪼개지고 합쳐지며 세찬 물줄기를 뿜어내고 거친 돌풍을 일으켰던 빗방울들이, 이번에는 질서 정연하게 비슷한 크기로 정숙하게 떠 있다가 햇빛을 받아 굴절하고 반사하여 환상의 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시간에 함께 있더라도 각자 다른 무지개를 본다.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등진 해의 각도가 다르고, 햇빛을 받은 물방울은 다른 각도로 반사하고 굴절하여 관찰자의 시야에 들어온다. 각자 다른 물방울이 다른 각도로 보내온 빛을 보는 것이다. 다만 그 차이가 미세하여 같은 무지개라고 생각할 뿐이다. 어릴 적엔 무지개를 쫓아 가까이 가보려 한 적이 있었다. 곧장 나아가고 싶어도 구부러진 골목길에 막혀 이리저리 헤매다 좀 더 가까이 가보아도 무지개는 여전히 먼발치에서 기다릴 뿐이었다. 그 간격은 결코 좁혀지지 않았다. 설령 빠른 걸음으로 폭풍우의 끝자락에 다가서 본들, 손에 잡히는 건 축축한 습기뿐이고 무지개의 형체는 온데간데없을 것이다. 멀리 있을 때는 다가가고 싶고, 가까이 가면 가질 수 없기에 무지개가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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