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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어느 레즈비언 할머니의 결혼 [슬기로운 기자생활]

등록 2022-10-20 18:02수정 2022-10-21 02:37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의 주인공 김인선씨(왼쪽)와 이수현씨. 반평생을 함께해온 두 사람은 지난 8월31일 독일 혼인청에서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반박지은 감독 제공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의 주인공 김인선씨(왼쪽)와 이수현씨. 반평생을 함께해온 두 사람은 지난 8월31일 독일 혼인청에서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반박지은 감독 제공

이지혜 | 경제팀 기자

대특종도 아니고 그럴싸한 상을 탄 기사가 아니어도,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사를 기자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내게도 문득 떠올리면 내심 뿌듯해져 종종 꺼내 읽는 기사가 하나 있다. 약 4년 전 독일 베를린에서 만난 김인선씨와 나눈 인터뷰 기사 ‘“내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나, 천사인 척하고 싶지 않아”’다.

1972년 22살의 나이로 독일에 건너가 정착한 ‘1세대 이주 간호사’ 인선씨는 독일 땅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주민들의 임종을 지켜온 호스피스다. 그의 활동이 독일과 한국에서 꽤 주목을 받은 터라, 2010년대 초부터 국내 매체에선 ‘재독 호스피스 김인선’을 독자에게 소개해왔다. 하지만 이 기사들은 인선씨를 절반만 보여줬다. 그는 파독 광부와 결혼하고 뒤늦게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혼을 감행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인생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내 기사는 반평생을 동성 연인 이수현씨와 함께해온 ‘성소수자 김인선’을 집중 조명한 초기 인터뷰 중 하나였다.

토요일치 신문 1개 면을 털어 실은 그 인터뷰는 나름 반향이 있었다. 이주민·성소수자·여성이라는 다층적 소수자성을 가진 인터뷰이의 삶 자체가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더구나 유럽 사회였기에 드러날 수 있었던, 한국에선 쉬이 찾아볼 수 없는 ‘레즈비언 할머니’의 롤모델이기도 했다. 물론 퀴어 이슈를 다룬 기사에 귀신같이 따라붙는 ‘악플’도 쏟아졌다. 악플에는 이골이 난 지 오래였지만 특히 날 억울하게 만든 반응도 있었다. “그냥 조용히 살지 뭐 자랑이라고 나대냐.” 내 잘못으로 인선씨가 괜한 소리를 듣게 된 건 아닐까 싶어 주눅이 들었다.

다시 용기를 얻은 건 남몰래 조용한 기적을 엿본 뒤였다. 기사가 나간 뒤 드문드문 인선씨 연락처를 묻는 메일이 날아들었다. 보낸 이는 대체로 40~50대 여성이었으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겪고 있는 혼란을 고백했다. 자신도 인터뷰 속 주인공처럼 늦은 나이에 이르러 동성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이 복잡한 감정에 관해 인선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냐고 물었다. 꼭 귓가에 사각거리는 속삭임 같은 메일이었다. 마침내 자신의 ‘벽장’을 열고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까지 그들이 얼마나 길고 긴 망설임의 시간을 보내왔을지 상상해보자니, 그깟 악플 따위가 대수냐 싶었다.

이 비밀스러운 메일들은 “조용히 살지 뭐 하러 나대냐”에 대한 정확한 반박이다. 아무리 ‘침묵하라’는 압박이 거세도 인선씨 이야기를 기어코 전해야만 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인선씨의 목소리가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던 벽장 속 성소수자에게 작은 ‘노크’로 가닿아 자신을 직면할 용기로 싹트는 장면을 목격하면서 감히 생각했다. 그 인터뷰가 세상을 구할 수는 없었겠지만 적어도 어떤 이의 세상을 바꿔놓긴 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2018년 인터뷰 당시 “결혼을 생각하고 있다”던 인선씨는 지난 8월31일 독일 혼인청에서 수현씨와 법적 부부가 됐다. 지난주 부산에서 이 늦된 신혼부부를 만날 기회가 생겨 직접 축하를 전할 수 있었다. 이들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두 사람>이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으로 오른 참에 부부가 함께 한국을 찾은 것이다. 일흔을 넘겨 결혼을 결심한 이유와 소감을 물었더니, 수현씨가 답했다. “나이 먹고 이 친구(인선씨)가 아프기 시작하면서 결혼 생각을 줄곧 했어요. 이 친구가 중환자실에 있어도 나는 가족이 아니라 의사 면담도 못 하니까요. 퇴원하고 곧장 손 붙잡고 독일 혼인청으로 갔어요. 결혼한 뒤 병원에 따라가서 ‘우리는 가족’이라고 했더니 진료실에 들어와도 된대요. 차이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여전히 한국 퀴어들은 법적으로 부부가 될 수 없고 아무리 늙고 쇠약해져도 가족 자격으로 자기 짝을 의사에게 데려가지 못한다. 만일 독일 퀴어들이 “조용히 살지 뭐 하러 나대냐”는 말에 풀죽어 침묵했다면, 이 70대 레즈비언 커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인선씨와 수현씨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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