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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경험 자체의 시간

등록 2022-10-23 17:42수정 2022-10-24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서울 말고] 이나연 | 제주도립미술관장

온라인 플랫폼 서비스가 먹통이라 혼란스러웠던 토요일 저녁 시간, 평소 쓰던 내비게이션 대신 다른 앱을 가동해서 저지리 예술인마을에 갔다. 처음 쓰는 지도시스템이 새로운 경로로 안내해준 덕에, 평소와는 달리 생경한 느낌이었다. 주말에 일하러 가는 마음이 아니라 놀러 가는 마음이라 그랬는지, 낮 시간이 아니라 어두워질 무렵 이동을 하느라 그랬는지, 모든 게 새삼스러웠다.

내가 일하는 곳은 제주공항 인근의 도립미술관이고, 도립미술관 산하에는 현대미술관과 공공수장고가 있다. 이 두 개의 산하기관은 저지리의 예술인마을에 있다. 도립미술관과 차로 45분 거리다. 현대미술관 바로 옆에는 ‘미술관옆집 제주’가 있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창작공간이다. 때로는 작가 레지던시를 진행하고,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기도 하는 이곳은 이유진이라는 작가 겸 기획자가 운영한다.

리크릿 티라바니자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타이인 작가가 제주비엔날레 참여를 위해 공간 리서치와 작품 제작을 위해 미술관옆집을 일주일간 방문했다. 내가 찾은 날은 벌써 다음날 떠나야 하는 티라바니자를 보내는 작은 환송회였다. 친한 동네 친구들이 불을 피워 바비큐를 하는 자리에 먼 동네 사람으로서는 영광스럽게 초대받았다. 바비큐보다도 전날 저녁으로 티라바니자가 만들었다는 타이식 야채커리(카레)가 남았다고 해서 한 국자 먹어볼 수 있어 좋았다. 티라바니자의 타이 카레를 먹었다는 것은 단순 식사를 떠나 현대미술 맥락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 작가의 대표 작품이 1992년 뉴욕 303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바로 이 타이식 채소 카레를 만들어 관객들과 나누어 먹은 것이기 때문이다. 2012년 파리 트리엔날레 버전은 그랑팔레의 거대한 공간을 공공급식소처럼 꾸려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카레를 먹는 것이었다. 2022년 제주에서의 어느 날, 티라바니자의 작품을 갤러리와 미술관 맥락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경험한(먹은) 셈이다. 이를테면 작가가 만든 작품의 개인소장가가 된 셈인데, 전혀 의도치 않게 마주친 이 체험에 대해서 후에 제대로 곱씹어보려고 한다. 제주막걸리와 고소리술을 먹으며, 카레보다는 흑돼지 바비큐를 좋아하는 작가와 블랙핑크의 신곡 이야기를 하느라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누질 않았다.

작품을 보는 것보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뭔가 일어나는 일이 중요하다는 작업원칙을 가지는 티라바니자는 관계미학의 대표 주자로 유명하다. 니콜라 부리오라는 미술평론가가 <관계의 미학>이란 책에서 1990년대 예술의 형태를 ‘관계’라는 키워드로 묶어냄으로써 동시대 미술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통찰을 제시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을 것처럼 여기저기 질서 없이 출몰하는 현대미술을 작품과 관객이 만나는 관계에 집중해 이론을 만들어 내는 데 티라바니자의 작품은 적합했다.

해가 지고, 온도가 점점 떨어지자 자연스럽게 모닥불 가에 둥그렇게 모여 앉게 됐다. 티라바니자가 귀신 얘기를 시작했다. 몸무게가 갑자기 두 배로 늘어나서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죽은 여자가 어깨에 올라타 있었다는 특별할 것 없는 얘기였다. 그 얘기를 들은 대가로 각 지역별 나라별로 귀신 이야기로 화답해야 했다. 과연 그는 사람을 모으고 관계를 맺는 데 능했다. 온라인 플랫폼이 먹통인 동안 오프라인 플랫폼이 매끄럽게 가동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불 옆에서 옛날이야기를 진짜 사람끼리 대면하면서 하고 있구나 싶었다. 조명이 많은 시내로 돌아가는 길엔 별이 많았고, 메신저 서비스는 여전히 먹통이었고, 깜깜한 밤길은 오싹오싹 무서웠다. 제주는 조금만 시내를 벗어나도 가로등 수가 현저히 줄어드는데 새로 쓰는 길안내 앱이 자꾸만 안 가본 어두컴컴한 길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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