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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상상과 발굴과 복원과 재해석으로 채워질 이야기

등록 2022-10-25 18:35수정 2022-10-26 02:36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본 이야기가 현실에서 있었던 일이란 걸 알게 되면 놀랍고 신기한데, 더 놀라운 건 지어낸 이야기보다 실제가 더 드라마틱할 때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하와이로 간 문양목의 생이 그렇다.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차이나타운과 동인천 일대는 흥미로운 여행지다. 1882년 제물포가 개항지로 선정되자 일본과 청나라는 물론 프랑스·미국·독일 등 다양한 나라 사람들이 제물포항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온다. 덕분에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을 비롯한 여러 나라 외교관들의 사교 장소인 제물포구락부, 최초의 서구식 공원인 각국공원, 가장 오래된 서양식 성당 등 다양한 근대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근대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공부할 때 좋은 현장이었기에 로드스꼴라 학생들과 꽤 여러번 이곳을 여행했다.

여행 말미에 종종 숙소에서 상황극을 하고 놀았는데 학생들은 그날 방문했던 다양한 장소들을 배경으로 기발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곤 했다. 일테면 대불호텔을 무대로 선교사와 상인, 사무라이, 급사, 인력거꾼이 등장한다. 인력거꾼은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던 이로 도망 중이고 급사는 고종의 밀사로 정보를 모으는 임무를 맡은 비밀요원이다. 사무라이는 일본에 저항하는 위험인물들을 제거하는 자객인데 아뿔싸, 동학도의 멋짐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만다. 선교사는 이들에게 신세계로 가라고 조언해준다. 그 신세계는 하와이다. 상인은 인삼과 설탕 무역을 할 요량으로 이들과 배를 탄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공연을 보며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는다.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본 이야기가 현실에서 있었던 일이란 걸 알게 되면 놀랍고 신기한데, 더 놀라운 건 지어낸 이야기보다 실제가 더 드라마틱할 때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하와이로 간 문양목의 생이 그렇다.

양목은 동학도였고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했다. 동학은 조선 왕실과 기존의 시스템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사상이자 종교이자 학문이었다. 사사천 물물천 이천식천 인내천(事事天 物物天 以天食天 人乃天). 사람과 소와 닭과 나무와 짚신이 모두 하늘이라니, 그 안에서 반상 구별과 여성과 남성의 위계, 동물과 인간 사이 관계는 새롭게 배치되고 재정의된다. 가히 개벽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놀랍도록 대담하고 혁명적인 사상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고 존망의 갈림길에 섰던 조선 왕조는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지방관들의 수탈과 착취에 항의해 1894년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조선 왕조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곧이어 일본군도 조선에 무장 입성한다.

양목은 충청도 태안 사람으로 1869년에 태어났다. 어업과 농업을 겸하며 생업을 이어가던 청년은 동학에 매료되고 관계의 혁명에 눈뜬다. 남쪽에서 궐기한 동학군이 충청도를 향해 올라오자 태안지역 동학도들은 이들과 합류한다. 이들은 태안 일대 성들을 점령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지만 훈련된 관군과 총포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쫓기며 전사하거나 뿔뿔이 흩어진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양목은 아내와 함께 인천으로 향한다. 태안에 머물면 체포돼 처형당할 것이므로 고향을 탈출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숨어든 것이다. 양목은 인천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며 시대변화에 눈을 뜬다. 오래된 것들은 허물어지고 새로운 것들은 침략적이었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나라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이곳에서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저곳에서라면 이곳이 잘 보이지 않을까? 양목은 하와이로 가기로 결정한다. 1905년 양목은 인천항에서 배를 탄다.

우리 학생들이 상상하여 만든 드라마와 일치하는 내용은 여기까지다. 픽션에서 빠진 이가 있다면 김해 김씨와 필원이다. 양목과 함께 험난한 생활을 하다 딸을 낳고 죽은 아내 김해 김씨, 형의 집에 맡겨진 딸 필원. 한 사람은 땅에 묻고 한 사람은 가슴에 묻은 채 양목은 새로운 세상으로 향한다.

하와이에서 1년 동안 사탕수수밭에서 일하며 이민여비 대출금을 조기 상환한 양목은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농장일을 하며 한인단체에 관여하게 된다. 동학 접주였던 장경 등과 대동보국회를 결성하고 이후 다른 한인단체들과 통합해 대한인국민회를 설립한다. 대한인국민회는 샌프란시스코에 본부를 두고 북미, 하와이, 멕시코, 시베리아, 만주, 연해주를 아우르는 해외 한인사회 중추기관으로 자리매김한다.

양목이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을 때 더럼 스티븐스가 샌프란시스코에 나타난다. 조선 정부 외교고문이라는 직책을 가지고도 일본 편에 서서 조선을 병탄하는 데 노력한 미국인이다. 스티븐스는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와 한 인터뷰에서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은 일본의 정당성을 역설하는 한편 조선은 일본의 보호통치 아래서 나날이 경제 발전을 이룩하고 있으며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한인들은 집회를 열어 스티븐스를 규탄하고 직접 찾아가 항의하기로 한다. 양목과 정재관, 최정익, 이학현이 스티븐스가 묵는 호텔로 찾아가 발언 취소 기자회견을 요구하지만 스티븐스는 이완용을 두둔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옹호한다. 분을 못 이긴 정재관이 스티븐스를 가격하고 양목이 의자로 내리치는 동안 이학현이 영어로 자신들이 왜 그를 구타하는지 큰 소리로 연설했다. 소동이 벌어지고 경찰이 오는 동안 일행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위험을 감지한 스티븐스가 워싱턴으로 가기 위해 다음날 페리 부두에 도착하자 한 청년이 스티븐스에게 다가섰고 손수건으로 감싼 권총을 발사했다. 불발이었다. 스티븐스 일행이 청년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다시 총알이 날아들었다. 첫발은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청년이 맞았다. 이어 두발이 연달아 발사돼 스티븐스에게 명중했다. 두 사람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25살 전명운과 32살 장인환이었다. 이들 모두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청년들이었다. 양목은 이들의 재판 후원과 경비 조달, 변호사 교섭을 맡아 동분서주한다. 이듬해 하얼빈에서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총을 쏜다.

이야기는 어쩌면 여기서 시작된다. 양목의 생에는 안창호, 장인환, 박용만, 이승만, 밀, 포도, 사탕무, 금광, 햇빛, 바람, 파도, 아일랜드계 변호사 등이 등장한다. 사진만 보고 배필을 정하는 ‘사진신부’로 양목과 혼인한 찬성, 천지인으로 이름지은 천혁 지혁 인혁 세 아들과 딸 한나도 주요 등장인물이다. 그들 사이 공간과 틈은 상상과 복원과 재해석과 발굴로 채워질 수 있다. 다시 전환의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힌트와 용기와 모험의 정신을 제공할지도 모르는 이야기. 어쩌면 넷플릭스가 가장 기다리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독립운동가 문양목 평전>(최재학 지음)을 참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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