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가 지난 25일 런던 다우닝가 10번지 총리관저 앞에서 총리직 사임에 앞선 고별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UPI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신기섭 | 국제뉴스팀 선임기자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무턱대고 대폭 깎아주겠다고 선언해 온 나라를 대혼란에 빠뜨린 리즈 트러스 전 영국 총리가 25일 취임 7주 만에 물러났다. 온갖 비판 속에 불명예스럽게 물러난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이날 아침 퇴임 연설에서 영국은 여전히 세금을 낮추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3일 450억파운드(약 74조원)에 이르는 감세안을 내놔 영국 국채와 파운드 가치 폭락을 유발한 책임자의 이런 발언은 무서우리만치 고집스러운 집착을 보여준다.
트러스 전 총리는 자신의 감세정책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브렉시트), 영국의 주권과도 연결해 강조해왔다. 그는 퇴임 연설에서 “유럽연합 탈퇴로 얻은 자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 20일 총리직 사퇴를 발표하면서도 “유럽연합 탈퇴로 얻은 자유를 활용할 ‘저세금 고성장’ 경제 비전”을 세웠지만 상황 때문에 실현할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유럽연합 개입 없이 마음대로 경제정책 등을 펼 수 있게 된 걸 말한다.
그가 꿈꾸는 자유가 환상이라는 게 증명되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았다. 금융시장이 대혼란에 빠지자, 트러스 정부는 감세정책 발표 열흘 만인 지난 3일 소득세 최고세율 인하 계획을 철회했다. 그래도 상황이 진정되지 않자, 트러스 총리는 14일 법인세 인하 계획도 철회하고 쿼지 콰텡 재무장관을 경질했다. 후임자인 제러미 헌트 장관은 17일 감세안 대부분을 파기했다. 트러스와 콰텡의 ‘저세금 고성장’ 꿈이 산산조각 나는 데까지 고작 24일이 걸렸다.
사태가 이렇게 빠르게 전개된 배경에는 퇴직연금이 있다. 노동자들에게 지급할 퇴직금 재원을 관리하는 연기금들은 확정급여형(퇴직 때 지급할 금액이 고정된 경우) 퇴직연금의 경우, 부채연계투자(LDI)라는 투자전략을 활용한다. 퇴직금 재원으로 국채 같은 안전한 자산을 산 뒤 이를 담보로 돈을 빌려 파생금융상품에 투자하는 전략이다. 미국 투자은행 제이피모건의 분석을 보면, 영국의 확정급여형 퇴직연금은 지난해 말 기준으로 1조8천억파운드(약 2970조원)의 자산과 1조7천억파운드(약 2800조원)의 부채가 있다.
감세정책 충격으로 국채가격이 폭락하자, 연기금이 담보로 맡긴 자산의 가치도 따라서 떨어졌고 돈을 빌려준 기관들은 담보를 더 요구했다. 연기금들은 돈을 마련하기 위해 국채를 내다 팔았고, 이는 다시 국채가격 하락(담보가치 하락)을 불렀다. 혼돈의 악순환이다. 이 때문에 지난 8월 초 2%에도 못 미치던 영국 10년 만기 국채 수익률은 10월 중순 4.5% 수준까지 치솟았다.(수익률 상승은 국채 가치 하락을 뜻한다.)
제이피모건은 연기금들이 지난 8월 초부터 10월 중순까지 본 평가손실이 최대 1500억파운드(약 247조원)에 달할 것으로 분석했다. 이 손실은 어떤 식으로든 기업과 노동자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의 퇴직금까지 위험에 빠뜨린 트러스 전 총리는 7주 동안 재임하고 매년 11만5천파운드(약 1억9천만원)의 연금을 받게 된다고 한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유로운 영국’을 꿈꾼 총리 때문에 영국인들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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