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과학자, 그 고독하고 낯선 삶

등록 2022-11-16 18:46수정 2022-11-16 20:29

괴팅겐에 있는 독일항공우주센터(DLR) 지도. 독일항공우주센터 누리집 갈무리
괴팅겐에 있는 독일항공우주센터(DLR) 지도. 독일항공우주센터 누리집 갈무리

[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나는 과학자다. 과학자가 되기 위해 긴 시간 수련했고, 연구 기회를 얻기 위해 오랫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비교적 안정적인 자리를 얻고 나니, 나이 마흔이 돼 있었다.

연구실 책상 앞에 웅크리고 앉아 문득 지난날을 생각한다. 기억 속의 날들은 서로 비슷한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 냄새의 정체를 고독함과 낯섦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30인치 여행가방 하나와 노트북이 든 배낭을 메고 독일 프랑크푸르트공항에 내린 때는 2016년 늦은 봄이었다. 어떻게 되든 간에 연구자로 살아가겠다고 결심한 뒤였기에 의도적으로 짐을 줄였다. 떠돌이 과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노트북과 옷 몇벌, 그걸로 족하다.

내가 연구할 곳은 괴팅겐에 있는 독일항공우주센터(DLR)였다. 독일 전역 10곳 넘는 항공우주센터 가운데 1907년에 설립된 괴팅겐 항공우주센터는 내 전공인 열유체를 특화해 연구하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노벨상 수상자를 수십명 배출했다는 과학의 도시, 괴팅겐에서 연구자 생활이 시작됐다. 이 도시에서 나는 ‘걸어 다니는 삶’을 택했다. 테아터슈트라세(극장거리) 골목에 있는, 작은 서점 맞은편 건물 3층 내 작은 방에서 연구소까지 걸어서 30분 남짓인 거리를 매일 오갔다. 출근길은 대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어제 하다 만 코딩이 오늘은 어쩐지 잘 마무리되고, 멋지게 코드가 죽지 않고 돌아서 눈부신 결과를 뱉어낼 거라 기대했다. 반대로 늦은 저녁에는 피곤했고, 때때로 ‘나는 바보’라는 좌절감에 휩싸여 맥주 한잔이 간절한 채로 그 길을 거꾸로 걸었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그 길을 걷는 2년 동안 나는 고독했고 세상은 낯설었다.

그 낯섦이란 무엇이었을까?

괴팅겐은 과학의 도시답게 전세계에서 온 과학자와 과학도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나는 유일한 아시아계 여성이었다. 길에서도 동양인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그것이 낯섦에 한몫하지 않았을까? 독일 말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낯섦의 이유였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작은 도시가 너무나도 수수하고 낡고 아름다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서야 나는 어렴풋이 그 낯섦의 정체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다. 그 길을 걷는 모든 순간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코드의 다른 줄을 생각하고 있었고, 코드에 이식할 좀 더 개선된 물리 모델을, 좀 더 정확하고 빠를 알고리즘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 모든 생각이 나에게는 처음 디디는 세상이었다. 그렇다면 설명이 된다. 그 길이 아니라, 그 길을 밟고 있던 내 머릿속 세상이 낯선 것이었다. 그 낯선 세상에 발을 디디면서 ‘이게 맞니? 맞는 거 확실해?’라며 막막해하고 낯설어하던 것은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서야 깨닫는다.

‘스승 없이 독립 연구자로, 온전한 과학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때부터였구나, 그 낯설고 고독했던 출퇴근길 말이야.’

시간이 제법 흘렀다. 괴팅겐을 떠나 영국 에든버러와 미국 하와이를 거쳐 한국 대전에 정착했다. 이제 나는 팀을 꾸리고 리더가 됐다. 가진 짐은 30인치 여행가방 한개 분량보다는 훨씬 더 늘었고, 생활은 안정돼 간다. 매트리스만 덜렁 놓인 바닥이 아니라 튼튼하고 무거운 프레임이 받쳐주는 침대에서 자고, 전자책이 아닌 종이책을 사서 책장에 다시 꽂는 안락의 기쁨이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생각의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과학자의 그 고독한 낯섦을 동경한다. 과학자로 살아갈 내내 그것을 동경하며 살 것이다. 낯선 순간이, 그래서 막막하고 고독한 시간이 자주 와주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한발씩 한발씩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가서 새로움을 만나는 순간, 그때만큼 과학자에게 영예로운 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1.

내란을 일으키려다 사형당하다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2.

[사설] 윤석열·국힘의 헌재 흔들기 가당치 않다

증오의 시대, 기적의 순간들 [젠더 프리즘] 3.

증오의 시대, 기적의 순간들 [젠더 프리즘]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4.

앞으로도 우린 파쇼와 싸우게 된다 [아침햇발]

[유레카] 대통령까지 중독된 알고리즘 공화국 5.

[유레카] 대통령까지 중독된 알고리즘 공화국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