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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슬기로운 믹스생활

등록 2022-12-15 19:19수정 2022-12-15 19:28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장현은 | 사회정책팀 기자

기자지망생이 하는 최대 고민에는 어떤 기사로 세상을 바꿀까, 나는 왜 기자가 되고 싶은가 같은 거창한 고민 말고, “이메일 뭐로 짓지?” 따위의 것이 있다. “기자 되면 이메일 뭐로 지을 거예요?” 면접 예상 질문으로 꼽히기도 하고, ‘일단 이 산을 넘으면’이라는 가정을 하다 보니, 취준 생활의 고단함을 틔워주는 작고 소중한 상상이기도 하다. 나 역시 그 난제를 고민하다 <한겨레> 면접 때 썼던 ‘믹스’(mix)라는 별명을 가져다 이메일로 썼다. 한겨레는 실무면접 때 실명이 아닌 별명을 부르게 돼 있는데, 나름 의미 있게 지었다고 생각했다.

“믹스커피 한잔을 마시는 짧은 시간에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발견하는 기자가 되겠다.” 면접 때 내 별명을 소개하면서는 미리 준비한 믹스커피까지 꺼내 보이며 현장을 중시하는 기자에 대한 의지와 자신감을 강조했다.

그렇게 내 별명은, 그리고 기자 이메일은 ‘맥스’도 ‘맑스’도 아닌 믹스가 됐다. 면접장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활용해 한껏 과장했지만, 진심이었다. 접근성 좋은 믹스커피가 누구에게나 사랑받듯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장 중요한 취재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사를 쓰고 싶었다.

호기롭게 믹스커피를 쳐들던 지원자는 그렇게 1년3개월째 사회정책 담당 기자로 일하고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수습 기간을 겪고, 보건복지팀을 거쳐 노동팀에 있다. 바라던 대로 이 일에는 수많은 커피 한잔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을 만났다. 특별히 코로나19 시기에 보건복지 기자로 취재하면서 가족을 코로나로 떠나보낸 이들을 만났고, 코로나 후유증 피해자들을 만났다. ‘세 모녀’와 같은 복지 공백에 있는 사람을 만나고, 몸이 아픈 노숙인을 만났다. 예상대로였다. 누군가를 만나고, 내가 그 안에서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하지만 커피 한잔이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이야기를 포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야기를 잘 전달하는 건 더 중요했다. 특히 사건팀이 아니라 정책을 다루는 팀이다 보니 그 정책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 정책이 당신의 삶과 연관된 문제라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지난 10월 에스피씨(SPC) 평택 빵공장에서 20대 청년이 산업재해를 당했다. 3일 동안 빈소를 방문하며, 유족이 마음을 열기를 기다렸다. 3일째 만남에서 나에게 입을 연 유족 어머니의 이야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이 20대 청년의 죽음에는 특별연장근로 허용에 따른 장시간 노동, 규제가 없다시피 한 야간 노동, 미비한 중대재해처벌법 등과 관련 있었다. 다행히 이 충격적인 죽음에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가졌다. 이 청년의 죽음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느꼈다.

무거운 죽음의 이야기가 있다면 무거운 삶의 이야기도 있다. 최근 화물연대 파업 취재가 그랬다. 농성 현장에서, 시멘트 회사에서, 원청 본사 앞에서 화물 노동자들을 만났다. 하루 20시간을 일한다는 어떤 이의 근무표와 몇해 전 터널 졸음운전 사고로 사망했다는 동료 이야기, ‘저녁’이 없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는 쉬이 상상이 잘 안됐다. “못살겠다”고 파업 현장에 나온 그들은 결국 2주 만에 다시 그 죽음의 도로로 돌아가야만 했다. 한 화물 기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인천신항 농성 현장은, 그가 타준 믹스커피가 금방 식을 만큼 바람이 찼다. 그보다 더 차가운 그의 인생 이야기를 내 기사는 얼마나 충실히 반영했을까. 그의 안전이 이를 읽는 독자의 안전과 무관하지 않음을, 안전운임제가 당신과 상관없는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반성컨대 나는 기사에서 그 커피 한잔을 잘 녹여내지 못한 것 같다.

“근데 왜 믹스예요?”

명함에 찍힌 이메일 mix를 보고 묻는 취재원에게 요즘은 다소 민망하게 이유를 설명한다. “아 그, 믹스커피의 믹스인데요….” 호기가 민망이 되어버린 2년차 기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보통의 이야기’들은 더 무겁다. 그의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임을 더 잘 보여주는 기사를 쓰는 것, ‘슬기로운 믹스생활’의 존재 이유가 될 것 같다.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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