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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150년만의 사과가 남긴 것

등록 2022-12-22 18:40수정 2022-12-22 19:02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지난 19일 헤이그 국립 박물관에서 과거 네덜란드가 자행한 노예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지난 19일 헤이그 국립 박물관에서 과거 네덜란드가 자행한 노예제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있다. EPA 연합뉴스

[코즈모폴리턴] 조기원 | 국제뉴스팀장

안톤 더콤(Anton de Kom)은 한국에도 동명의 드라마 무대로 알려진 남미 국가 수리남 출신 저술가이자 운동가였다. 그가 태어난 1898년은 수리남에서 노예제가 폐지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그의 아버지도 노예였다가 해방된 농민이었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였지만 수리남에서 빈곤은 심각한 문제였고, 그는 친척들에게서 노예제에 관해 들으며 성장했다. 20대 초반 수리남을 식민지배했던 네덜란드로 건너가 일하다가 좌파 운동에 가담했다. 35살 때인 1933년 1월 수리남으로 돌아오자 식민당국은 그를 요주의 인물로 보고 감시했다.

그는 고향에서 같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 출신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등에 관해 상담하다 식민당국에 체포됐다. 주민들이 그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자 식민당국이 발포해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식민당국에 의해 그해 5월 네덜란드로 쫓겨난 그는 수리남의 아픈 역사를 담은 <우리 수리남의 노예>(1934년)를 썼다. 책에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등에서 납치한 흑인 등 노예들을 동원해 수리남에서 플랜테이션 농장을 운영한 이야기 등이 담겼다. 이후 네덜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자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했다가 붙잡혔고, 독일 항복 2주 전인 1945년 4월24일 강제수용소에서 결핵으로 47살에 숨을 거뒀다.

지난 19일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자국이 과거 노예제로 치부했던 사실을 공식으로 사과하며 안톤 더콤이 쓴 <우리 수리남의 노예>를 언급했다. 뤼터 총리는 안톤 더콤이 책에서 묘사한 “사람들이 채찍질 당하고 고문당해 죽고,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뜨거운 다리미로 얼굴이 찍히는 일”을 언급하며 노예제의 참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네덜란드는 17~18세기 60여만명을 노예로 사고팔아 부를 축적해 제국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1863년 7월1일에야 해외 식민지에서도 노예제를 폐지했는데, 수리남에서는 과도기 10년이 적용돼 1873년에야 완전 폐지됐다. 뤼터 총리의 사과는 그로부터 149년 만에 나왔다. 농장주들은 노예제 폐지 당시 보상을 받았으나 노예로 고통받던 이들에 대한 보상은 없었다. 플랜테이션 농장은 노예제 폐지 이후에는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지에서 온 이주노동자들에 의해 운영됐다.

네덜란드 정부의 공식 사과에는 안톤 더콤 같은 피식민지배인들의 저항 활동이 큰 몫을 차지한다. 최근 네덜란드뿐 아니라 유럽 각국은 과거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배 반성 또는 사죄에 나서고 있다. 독일은 지난해 아프리카 나미비아 식민지배 당시(1884~1915년) 저항운동을 벌인 원주민을 학살한 사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벨기에 필리프 국왕은 지난 6월 식민지배했던 콩고민주공화국을 방문해 유감을 표명했다.

하지만 이들의 반성은 배상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배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고, 독일도 나미비아에 개발지원금을 약속했을 뿐이다. 벨기에는 국왕의 유감 표명이 있었을 뿐 공식 사과도 하지 않았다. 물론 피해자 후손들은 사과와 함께 배상 같은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이라고 촉구하고 있다. 식민지배와 제국주의 역사가 끝나고 몇 세대가 흘렀지만, 제대로 된 정의로 가는 길은 여전히 멀기만 하다.

gard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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