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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썩지 않는 세계가 위험하다

등록 2022-12-25 18:40수정 2022-12-25 19:32

지구의 날을 맞아 지난 4월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이벤트광장에서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기 위해 열린 ‘고 네이키드, 노 플라스틱’ 캠페인에서 시민 활동가들이 일상에서 배출되는 식품 포장재 등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구의 날을 맞아 지난 4월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 이벤트광장에서 플라스틱 쓰레기 줄이기 위해 열린 ‘고 네이키드, 노 플라스틱’ 캠페인에서 시민 활동가들이 일상에서 배출되는 식품 포장재 등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말고] 명인(命人) | 인권교육연구소 ‘너머’ 대표

처음으로 농어촌 지역에 살게 된 겨울, 살림하면서 가장 난처했던 것이 어마어마한 쓰레기였다. 도시 살림과 달리 먹는 게 달라지니 어떻게 처리할지 난감한 쓰레기들이 생겼다. 채소 다듬고 나온 부산물들이야 음식물 쓰레기로 분류한다지만, 가령 먹을 때마다 엄청나게 많이 생기는 굴 껍데기, 홍합 껍데기는 분리배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걸 다 담으려면 대체 몇 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필요한 건지 아득했다. 제 농사도 없이 이웃들이 나눠주는 걸 얻어먹고, 선배를 따라 산이며 바다로 채취하러 다니는 게 전부인 데도 그랬다. 썩는다는 건 단지 더러운 것으로만 알던 때였다.

우리 밭이 생기고서야 썩지 않는 것의 무서움을 알았다. 이젠 어패류를 먹을 때마다 마당에 패총을 쌓는다. 사람이 다 먹지 못한 농산물은 짐승이 먹고 그래도 다 먹지 못한 농산물이나 부산물은 밭에 돌려주는 순환에는 쓰레기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온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변하고,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간다. 썩지 않는 것, 순환되지 않는 것만이 쓰레기다. 정작 혐오스러운 것은 곰팡이 슬고 흐물흐물해진 음식물이 아니라 갈 곳 없는 매끈한 페트병과 비닐, 플라스틱이었다.

그때부터였을까? 모든 사물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사물의 가치도, 아름다움도, 쓸모나 불편에 관한 생각도. 흠 없고 매끄러운 과일만 고르던 손이 벌레 먹은 과일의 상처에서 누군가를 먹인 자국을 본다.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며 누군가를 먹인 과일엔 또 누군가를 먹이기 위해 더 부지런해야 했던 어떤 농민의 땀이 숨어 있다. 색깔 맞춰 세트로 샀던 합성소재 책장보다 폐교된 학교에서 실어 왔던, 폐목재로 만든 책장에 더 정이 간다. 이 낡은 책장엔 수시로 말을 걸게 하는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나는 자주 상상한다. 너는 어디서 어떤 눈비를 맞으며 자란 나무였을까? 어쩌면 한때 누군가에겐 시원한 그늘이었을까? 처음엔 무엇으로 만들어졌다가 마침내 책장이 되었을까? 우리 집에 오기 전엔 여기 어떤 책들이 꽂혀있었을까? 시골의 작은 학교 도서관에 벌서듯 서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책 읽으러 오는 어린이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제 낡아가는 흔적들이, 너무 낡으면 조금씩 고쳐 쓸 수 있는 것들이 좋다.

사람도 그렇다. 나이 들면서 덜그럭거리기 시작하는 내 몸이 이제야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몸이 아니라, 마치 몸이 없는 것처럼 살던 젊은 날이 오히려 비정상적이었다. 두어시간만 책을 읽어도 흐릿해지는 눈처럼 이제야 몸의 신호를 알아차린다. 기미와 주근깨가, 잔주름 늘어가는 얼굴이 비로소 자연스럽다. 나는 이제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했고, 도움을 청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간다. 수치심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남에게 도움을 청할 줄도, 남을 돌볼 줄도 모르는 사람의 것이어야 한다.

삶도 그렇다. 합리적으로 이해되는 삶이 아니라 내가 늘 쩔쩔매던 결핍과 균열이 삶의 전제였다. 순환하는 자연의 세계가 그렇듯이 생의 반짝거리는 순간들은 거칠고 상처 나고 때로 악취가 풍기는 삶을 견디는 틈새에 있었다. 해진 옷을 누덕누덕 깁듯이 조금씩 수선하면서 간신히 꾸려가는 삶이라야 대견한 것이다. 단지 갈아엎어지기 위해 싹을 틔우고 자라서 간신히 꽃을 피우거나 그마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녹비작물(풋거름작물)처럼 사람도 꼭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이제야 생각한다.

후지하라 다쓰시가 역설하듯이 썩지 않는 세계만이 위험하다. 분해되지 않는 것,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버려지는 것, 낡기도 전에 새것으로 대체되는 것, 플라스틱과 콘크리트처럼 굳어진 것, 젊음과 건강만을 추구하는 사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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