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오전 강원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수면 위로 2023년 계묘년 새해가 떠오르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절기상 대한은 아직 멀었는데 벌써 동장군의 위세가 대단하다. 북극에 가두어 둔 얼음 보따리가 풀리기라도 한듯, 영하 20도에 육박하는 냉기가 시베리아 특급 열차를 타고 밀려온 것이다. 열대의 작열하는 태양 아래 한껏 데워진 후 중위도로 북상한 바닷물이 채 식기도 전에, 서해의 수증기와 북극의 찬 공기가 충돌하며 내륙 곳곳에 많은 눈을 쏟아냈다. 그런가 하면 동해상에서는 폭탄이라도 터지듯이 저기압이 급격하게 발달하면서 거센 파도가 동해안에 밀려왔다.
북극 한파가 몰아치는 날에는 철새처럼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가고 싶다. 한겨울 열대나 남반구 여름을 찾아가려면 짐 꾸리기가 보통 성가신 게 아니다. 출발할 때는 두터운 오버코트에 목도리로 칭칭 감아 매고 집을 나서지만, 막상 현지에 도착하면 긴 소매를 걷어 젖혀도 땀을 흘릴 지경이 된다. 한나절도 안 돼 영하 10도에서 영상 30도까지 기온이 오르면서 가파른 기후변화를 체험하는 순간이다.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국땅에서 성탄절이라도 겹치게 되면 정신마저 혼미해진다. 불볕더위에 푸릇푸릇한 초원 위로 산타가 땀을 뻘뻘 흘리며 오가는 광경은 왠지 낯설기만 하다..
사계절을 겪어보지 않으면, 그 고장 특유의 날씨를 알기 어렵다. 구름과 안개가 많은 영국 날씨라지만, 도착한 날 우연히 화창하게 갠 하늘을 보았다면 쾌적한 곳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현지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날씨는 그날의 표정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곳 특유의 기후를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오랜 시간 날씨와 공생하며 다듬어진 인상이 새겨져 있다.
여권 수속을 마치고 공항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주변 사람의 복장을 보면 바깥 날씨가 대강 짐작이 간다. 알록달록한 꽃무늬가 그려진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걸 보면, 해풍에 피부를 한껏 노출해야 견딜 수 있는 무더운 곳이리라. 리무진 버스를 타고 시내 호텔로 가는 동안, 도로 주변의 풍경이 눈길을 끈다. 이파리가 넓적한 가로수가 이어지고 과수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는 걸 보니, 비도 제법 내리지만 햇살도 풍부한 곳이 틀림없다. 도심 가까이 들어서니 가옥이 많아지고 복잡한 구조물이 들어온다. 적당한 크기의 창문이 빈틈이 없이 견고하게 여러 개 늘어서 있는 걸 보면, 사계가 뚜렷해 여름에는 햇빛을 가리고 통풍은 잘되게 하되, 겨울에는 바람을 막으면서도 햇빛은 받아들이고 싶어하는 이중성이 엿보인다. 호텔에 짐을 풀어놓고 허기를 달래려 일반 음식점에 들어간다. 이웃 식탁에서 풍기는 냄새가 예사롭지 않다. 레몬향이 가득한 회무침에 푸른빛이 감도는 칵테일이 방금 맞닥뜨린 날씨와 찰떡궁합이다.
문명의 이기가 지구촌을 하나로 묶어주고, 실내에서는 자유자재로 기후를 조절하여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는 만큼, 한때 의식주 문화를 통해 익히 간파했던 날씨도 뒤죽박죽돼버렸다. 공항은 다양한 기후권에서 떠나온 여행객들로 뒤섞이고, 음식 코너마다 열대와 중위도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요리를 선보인다. 난방과 냉방이 때맞춰 작동하면서, 내가 어느 계절에 있는 것인지 어느 기후권에 와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게다가 온난화가 날씨 변덕을 부추기며 기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가중된다. 기상 극값이 경신되는 건 이제 일상사다. 작년만 하더라도 봄에는 대형 산불이 이례적으로 열흘이나 지속했고, 여름에는 115년 만의 기록적 폭우가 쏟아졌다. 겨울이 되자 때 이른 강추위로 한강은 15일이나 일찍 얼어붙었다. 많은 눈이 쌓여 운송로가 끊기고 시설물이 내려앉으며, 경기 침체로 시름 하는 이들은 더욱 우울한 세모를 보내야 했다. 계묘년 새해에는 온순한 토끼처럼 날씨도 순탄한 한해가 되기를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