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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새해엔 노트북 대신 얼굴을

등록 2023-01-05 18:27수정 2023-01-05 18:46

서울 국회 정론관 내 기자회견장. 박승화 선임기자
서울 국회 정론관 내 기자회견장. 박승화 선임기자

김민제 | 사회정책팀 기자

약 2년 반 전 어느 날, 점심 먹고 회사 근처를 배회하는 나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기자님!” 그가 웃으며 인사하기에 나도 양 눈썹을 들어 올리며 반겼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하지만 그의 이름도, 직함도, 어떠한 호칭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가 누구인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를 기자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취재원이 맞겠거니 짐작했을 뿐이다. 예상은 다행히 빗나가지 않았다. 안부를 주고받는 사이 그가 누구인지 떠올랐고 순간의 위기를 그럭저럭 모면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나는 나의 기억력을, 정확히 말하면 얼굴을 기억하는 능력을 진지하게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와 나는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무려 하루 가까이 동행했던 사이였다. 함께 기차를 탔고 저녁식사도 했으며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눴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이 눈에 익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기에도 민망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취재 현장에서 만난 숱한 얼굴들을 나는 쉽게도 잊었다. 몇시간 대면해 인터뷰를 해도 돌아서면 생김새가 잘 그려지지 않는 일이 흔했다. 나에게 이런 망각력이 있다니 놀라다가도 한숨이 삐져나왔다.

그로부터 2년 넘게 흐른 지금도 개선의 여지는 보이지 않는데, 얼마 전 동료 기자로부터 저명한 신경학 박사가 소개했다는 ‘기억 잘하는 방법’을 추천받았다. 리사 제노바 박사의 <기억의 뇌과학>이라는 책에 나온 내용으로, 동료 또한 신통치 않은 기억력으로 고민이 많던 와중에 이 책을 만났다고 했다. 핵심은 싱겁게도 ‘주의 집중’이다. 주의를 집중한 순간일수록 기억이 잘 생성된다는 뻔한 이야기다. 굳이 신경학까지 전공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 아니냐며 투덜대다가, 익숙한 장면이 떠올라 고개를 조금 끄덕거렸다. 노트북 화면이나 휴대전화 메모장에 눈을 고정시킨 채, 취재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사 가치가 있는 내용들을 기록하기 바쁜 모습 말이다. 맞은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니 정보 자체는 기억할지언정 정보를 건넨 이의 얼굴을 기억 못하는 것이다.

그렇게 흘려보내도 되는 걸까. 마감에 쫓기며 일하다 보면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 위안하지만 문득 불안해진다. 취재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순간도 난감하지만, 무엇보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얼굴에 녹아 있을까 봐서다. 용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취재 현장의 얼굴들도 그랬던 것 같다. 이를테면 2019년 겨울 한 초등학교 급식실에서 만난 조리사들의 얼굴은 조리기구와 음식이 뿜어대는 열기에 붉게 상기돼 있었고, 쉴 새 없이 움직여 나오는 땀과 반찬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다 튄 물이 뒤섞이며 얼굴에는 습기가 마를 틈이 없었다. 그뿐이겠나. 장례식장 빈소 앞을 서성이는 기자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유족, 속내를 읽기 힘들 정도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고위공직자, 하다못해 길을 걷다 대뜸 맞닥뜨린 기자가 영 부담스러운 행인까지, 때때로 얼굴과 그 표정은 말보다 많은 것을 말해준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에는 역시 후회가 꾸역꾸역 고개를 든다. 지난 한해 만난 얼굴 없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늠하는 것을 보니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지금의 이 감정도 금세 흐릿해져, 올해에도 나는 또 여러 사람과 마주하고 뒤돌아서면 잊을 것이다. 낯익지만 누군지 모르겠는 이가 인사를 건네온다면 그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안부부터 묻고. 너무 잦은 만남에 그만 질려버리거나 유쾌하지 못한 대화를 나눈 날에는 기억을 휘발시키는 게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그간 얼굴을 쳐다보지 않아 놓쳐버린 것들이 못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새해니까, 세상 사람 누구나 3일치 작심을 하는 이때를 핑계 삼아 노트북보다는 마주 앉은 이의 얼굴을 좀 더 바라보자고 다짐해본다.

summ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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