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여성가족부·식품의약품안전처·질병관리청에 대한 업무보고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숨&결] 이주희 |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윤석열 정부는 노동유연화가 노동개혁이라고 한다. 이전 보수정부들로부터도 지겹도록 들어 전혀 새롭지 않다. 직무성과급은 심지어 문재인 정부도 추진했다. 독과점과 불공정 거래에 관한 근본적인 처방 없이 노동시장 이중구조를 개선하겠다는 것은 소가 우유를 만드는 대신 미적분을 풀기를 기다리는 것과 유사한 일이다. 노동자는 기업에 의해 일차적으로, 노동조합에 의해 이차적으로 조직된다. 즉,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는 노동조합이 아닌 경제의 이중구조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뜻이다. 수십년 전 권위주의 정권 시절부터 강조된 법치주의는 왜 또 나오는가.
내가 노사관계를 배우고 연구조교로도 함께했던 볼프강 슈트레크 교수가 미국 대학을 떠나 독일 막스플랑크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을 때,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다. 벌써 10여년 전, 노무현 정부 때였다.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그는 자문을 맡았던 게르하르트 슈뢰더 총리를 언급하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말해준 것과 완전히 정반대로만 해. 그래서 내 월급은 엄청 더 오르고 내 운전사 월급은 점점 더 낮아져.”
현 정부 노동전문가가 추앙하는 독일 하르츠 개혁 시기 노동유연화가 가져온 변화를 이보다 더 명료하게 설명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통독의 여운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남북한이 통일되면, 낮은 북한 임금을 남한과 맞추려고 너무 빨리 서두르지는 않으면 좋겠어.” 독일 금속노조(IG Metall)는 동독지역 노동자들의 긴 노동시간을 서독 수준으로 단축하기 위해 힘든 투쟁을 한 적이 있다. 우리 현실과 너무나 괴리가 커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본은 사내유보금으로 쌓아두거나 해외에 투자할 수 있다. 반면 살아 숨 쉬는 노동자는 실업이나 임금이 너무 낮은 상태에서 오래 견딜 수 없다. 이런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의 격차는 노사 간 심대한 권력의 격차를 낳는다. 파업권이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돼야 하는 이유다. 기업가의 이해는 너무나 명백해 오류 가능성이 거의 없다. 특히 이번 정부에서는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는다. 그러나 다양한 정체성과 욕구를 가지는 노동자는 다르다. 결국, 과로로 질병을 얻어 장기적인 노동소득의 손실이 더 크더라도 현재의 급박한 사정 때문에 치명적일 수 있는 장시간 노동을 지지할 수 있다.
생산자로서의 정체성과 소비자로서의 정체성도 대립한다. 사쪽에 대한 신뢰와 복지국가의 제도적 뒷받침 없이 기업별로 조직된 개별 노동자에게 자기 이해 대신 노동자 전체의 이해를 위해 행동하라는 것은 엄청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여기에 노동자에게 영향을 주는 상징과 가치에 대한 자본의 통제력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보라. 다수의 노동자는 자기의 이해가 왜곡되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지금은 연구소의 명예소장이 된 볼프강 슈트레크는 최근 저서 <어떻게 자본주의는 막을 내릴까?>에서 자본주의의 위기를 과도한 재분배가 아니라 노조의 쇠퇴, 부자와 기업 감세로 인한 복지국가의 후퇴와 폭발적인 소득불평등에서 찾는다. 노동조합을 포함한 다양한 저항운동으로부터 보다 인간적인 얼굴로 내적 혁신을 이뤄내던 자본주의가, 반대세력을 궤멸시킴으로써 오히려 스스로를 파괴할 수도 있는 자기 자신의 가장 강력한 적이 됐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정부는 변함없이 개혁 우려먹기를 한다.
이를 넘어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가 제시한 답처럼, 더 큰 무질서와 좌절로 각자도생의 신자유주의적 삶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이 무너져 내려야만 새 질서가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혐오 정치와 편향된 언론이 자아내는 지배문화의 헤게모니를 더 큰 희생이 발생하기 전에 중화시킬 수도 있다. 앞으로 몇명의 트럼프들을 더 만나야 끝날지 모르는 이 엄혹한 시기, 평범한 노동자 시민들이 노란봉투법을 지지해준다면, 이해의 왜곡을 유발하는 불안과 공포를 넘어서 한걸음 나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