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약 4년 전 그날은 비가 왔다. 쌀쌀하고 차가운 부슬비가 내리던 스코틀랜드의 전형적인 초봄 저녁. 연구실 동료들과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연구실을 나섰다. 예약한 식당에 도착해 옹기종기 모여 떠들고 있는데, 한 동료가 전화를 받으러 나가더니 돌아오지 않았다. 그를 데리러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두운 거리에서 비를 맞으며 무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구나.’ 한 동료가 들어오더니 말했다.
“교수님이 방금 돌아가셨어. 심장마비래.”
그날 저녁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산도 쓰지 않은 채 비를 맞으며 하염없이 걸었던 기억만 있다.
돌아가신 교수님은 내게 은인이었다. 독일에서 연구원 생활을 마칠 즈음 연구를 이어가기 위해 여러 나라 많은 이들에게 수많은 이력서를 보냈건만, 아주 적은 수의 응답을 받았다. 그때 ‘다음달 영국에서 열릴 학회에서 만나자’고 답신해준 분이 그였다. 다음달 학회에서 만난 우리는 긴 이야기를 나눴고, 나는 그의 연구팀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듬해 2월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도착한 내게 그가 말했다. “내 연구팀에 합류한 것을 환영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내 역할은 너를 돕는 거야.” 그 말을 들으며 속으로 되뇌었다. ‘나를 팀원으로 받아들인 당신의 선택이 옳은 선택임을 꼭 보여드릴게요. 그렇게 성장해서 이곳을 떠날 때 꼭 감사하다고 이야기할게요. 그렇게 이 은혜 갚을게요.’ 하지만 그는 불과 한달 뒤 세상을 떴다.
집에 돌아와 각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그의 부고를 알렸다. 시차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바로 전화를 걸어왔다. 우리는 전화기를 붙잡고 함께 울었다. 모두가 그에 관한 추억 두어가지를 늘어놓았다. 학자의 길로 들어선 우리가 직면한 연구와 진로, 그리고 인생에 관한 고민을 그가 얼마나 진지하게 함께 해줬는지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 모두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한 사람의 학자가 온전히 만들어지기까지 많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큰 조력자는 당연히 스승이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그 스승들이 나에게 준 것은 지식뿐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상의 존재와 그것을 알아가는 여정을 보여줬다.
독일어에 Doktorvater(독토어파터)라는 단어가 있다. Doktor(박사)와 Vater(아버지)를 합친 말로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뜻한다. 그러니까 박사 지도교수를 부모에 빗대어 표현하는 말이다(Doktormutter(박사+어머니), 즉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도 있다고 한다). 이 단어를 처음 알게 됐을 때 빙긋이 웃음이 나왔다. 박사 지도교수를 부모처럼 생각한 것이 나만이 아니었구나!(역시 독일이다. 그들은 모든 것을 지칭하는 단어를 만든다.) 그 뒤 나의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어느 학회에서 만나 장난스레 그에게 “Doctor Father”(닥터 파더, 박사 아버지)라고 불러봤다. 교수님은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너 그 단어 어디서 배웠니?” 물었다. 나는 지금도 그를 종종 만나면 “닥터 파더”라 부르고, 그는 어김없이 소리 내어 웃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이제는 내가 스승의 위치에 서게 됐다. 나의 연구팀을 꾸렸고 거기에는 나의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이 “교수님” 하고 부르면 그 단어가 가슴에 묵직하게 부딪혀 온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리는 그들을 보면, 그맘때 미지의 세계에 한없이 설레기만 하던 내가 생각난다.
이제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조력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한다. 어떤 조력자가 좋은 조력자인지는 사실 알기 어렵다. 그저 내 스승들이 내게 그랬듯이, 묵묵히 듣고 있다. 학생 노릇도 쉽지 않았지만, 스승 노릇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들이 가져오는 수많은 난관을 함께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하는 것, 그것으로 스승 노릇을 시작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