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3·1절 기념사에서 할 말은 아니었다

등록 2023-03-02 17:14수정 2023-03-03 10:59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서울 중구 유관순 기념관에서 열린 제104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남구 논설위원
정남구 논설위원
“우리에겐 산 말고 친구가 없다.” 쿠르드족의 격언이라 한다. 3천만명 안팎으로 중동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으면서도, 튀르키예 남동부에서 아르메니아, 이라크, 이란 일대에 자신들의 국가 없이 흩어져 사는 세계 최대의 무국가 민족이 쿠르드족이다. 그들의 독립국가 건설은 주변 강국의 방해와 배신으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번 세기에도 미국을 대신해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 격퇴에 적극 나서며 독립에 대한 후원을 기대했으나,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은 후원은커녕 시리아 북동부 자치 쿠르드족에 대한 튀르키예의 공격을 눈감았다. 그렇게 배신을 당했다. 어느 나라도 믿을 수 없는 그들에게 ‘친구는 산뿐’인 것이다.

쿠르드족에게만 해당되는 말일까? ‘친구’ 앞에 ‘영원한’이란 수식어를 하나 붙이기만 하면, ‘친구는 산뿐’이란 말에 모든 나라의 국민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팽창하는 세력에 맞서 살아남고 번영하려는 국가는, 필요하면 어제의 원수와도 손잡고, 우방을 등지기도 해야 한다. 애초 국가 간의 협력엔 공짜가 없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조선에 대병력을 보낸 것은 무엇보다 자국의 안보를 위해서였다. 명은 전쟁이 끝난 뒤 재정이 어려워지자 은을 채굴하지 않던 조선에서 수십만냥의 은을 긁어갔다. 이는 바닷가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사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최근 우리 처지도 꽤 곤혹스럽다.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 중국은 군사력을 키우고, 지역 패권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이미 군사강국인 일본은 미국의 지원과 협력을 등에 업고 군사력을 더 강화하고 있다. 북한은 미국과 협상이 좌절되자 핵위협을 본격화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대만 위기’가 멀지 않은 장래에 생길 수도 있는 일임을 일깨운다. 미군이 주둔 중이고, 남북이 대치 중인 한반도는 결코 그 자장 밖에 있지 않다. 우리의 당면과제는 중국의 무력 사용을 억제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일본과 협력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일본도 같은 처지다.

윤석열 대통령이 1일 3 ·1절 기념사에서 “복합 위기와 심각한 북핵 위협 등 안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한 ·미 ·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고 말했다 . 끝은 “우리 모두 기미 독립선언의 정신을 계승해서 자유 , 평화 , 번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자 ”고 마무리 지었다 . 그런데 기념사를 몇번을 반복해 읽어도 ,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

기념사에서 핵심문장을 추려봤다. 대통령은 ‘3·1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로운 민주국가를 세우기 위한 독립운동이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갑자기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했다. 조금 더 가다 또 갑자기 ‘지금 일본은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다’고 했다. 논리가 툭툭 튀는 이날 기념사의 결론은 ‘한·미·일 3자 협력을 잘 하자’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심각한 실언을 했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협력하자’고 해서가 아니다. 3·1절이 어떤 날인가? 일본 조선총독부 기록으로도 이 운동에 100만명 넘게 참가해 일본의 진압과정에서 553명이 목숨을 잃었다. 박은식 선생의 기록엔 7509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그런 희생 위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왜정 시대’를 ‘임정 시대’로 바꾼 가슴 벅찬 운동을 기념하는 날에, 대통령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한 것을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일본과 협력’을 강조하느라, 일본과 아직 해소하지 못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해야 할 자리를 그 말로 채웠다. 적어도 3·1절에 해서는 안 될 말이다.

한일 관계가 ‘일본군 위안부 배상’, ‘강제동원 배상’ 문제로 상당기간 삐걱거리고 있다. 양국 모두에 득 되지 않는 상황임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방적으로 굽히는 방식으로는 갈등도 해소되지 않고, 제대로 된 협력관계도 구축할 수가 없다. 대통령의 말은 ‘그냥 기어들어가자’는 말로 들렸다. 우리나라는 세계 6위의 군사력을 갖고 있고, 국내총생산 규모 세계 10위권의 국가다. 구한말의 상황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나라를 찾자고 총칼에 맞선 선열들의 기백과 희생을 기리는 날, 대통령이 국민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혔다.

jeje@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1.

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사설] 계속 쏟아지는 윤-김 의혹, 끝이 어디인가 2.

[사설] 계속 쏟아지는 윤-김 의혹, 끝이 어디인가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3.

정의가 무너진 곳에서는 싸우는 것이 정의다

‘자폭 기자회견’ 이후 윤석열-한동훈 움직임 [11월11일 뉴스뷰리핑] 4.

‘자폭 기자회견’ 이후 윤석열-한동훈 움직임 [11월11일 뉴스뷰리핑]

트럼피즘의 유령 [김누리 칼럼] 5.

트럼피즘의 유령 [김누리 칼럼]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