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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피아노 치는 기자

등록 2023-03-09 18:32수정 2023-03-10 02:36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우연 | 이슈팀 기자

약 5년 전 직업인의 세계로 발을 디디며, 취미활동이란 ‘짬이 나면 할 수 있는 걸 하는 것’이라고 정의내렸다. 기자 일의 특성 때문이다. 언제 어떤 연락이 올지 몰라 휴대전화를 멀리할 수 없다. 일과시간이 지나도 일에서 마음을 온전히 떼기 어렵다. 한때는 어떤 부름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스마트워치를 썼다(샤워하느라 시계를 벗어뒀는데도 손목에서 찌릿한 감각을 느낀 뒤로는 최소한의 존엄을 위해 사용하지 않지만). 그러다 보니 시간을 따로 빼서 무얼 하는 것이 벅차게만 느껴졌다.

아무리 바빠도 꾸준히 규칙적으로 업무 밖의 시공간에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1년 반 전 일본 자료를 읽어보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가지고 일본어 과외를 시작했다. 최근에는 인공지능 기반 번역프로그램 딥엘(DeepL)을 자주 사용해 공부할 필요가 사라졌지만, 당분간 그만둘 생각은 없다. 잠시나마 다른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토요일 80분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취미란 쓸모없을수록, 직업에서 활용할 일이 없을수록 효용이 커진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김에 영혼이 숨 쉴 시간을 더 주고 싶었다. 무엇을 새로운 취미로 삼을지 고민하던 찰나,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을 채운 클래식음악 플레이리스트가 눈에 들어왔다. 록과 일렉트로닉, 힙합과 알앤비(R&B) 등을 거쳐 최근 몇개월 가장 많이 듣는 건 클래식이다. 잡념을 비우고 싶을 때는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연주한 슈만의 <어린이 정경>을, 감정을 고조시키고 싶을 때는 양인모가 연주한 파가니니의 <24개의 카프리스>를 듣는다. 클래식음악은 같은 곡도 연주자마다 표현이 사뭇 다르기에, 익숙한 듯 새로운 느낌이 들어 좋다. 그때만 해도 ‘공연을 더 자주 보러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튜브로 피아니스트 손민수가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정갈하게 치는 영상을 보다가 불현듯 생각했다. 피아노를 쳐볼까?

스스로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내게 피아노는 트라우마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6살 때부터 피아노를 약 6년간 배웠으나 그 끝은 좋지 않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콩쿠르를 준비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던 기억이 강렬한 탓이다. 건반을 잘못 누를까 봐 내내 두려웠다. 학원에서 하루 연습량을 정해놓은 진도 카드를 거짓으로 쓴 게 부지기수다.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해보는 것보다 한번 실패했던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두렵다. 힘들고 위축됐던 어느 지점을 다시 마주할까 봐. 방 안에 있던 업라이트 피아노 덮개를 오랫동안 열지 못한 이유다.

선구자의 경험담 덕분에 용기를 얻었다. <다시, 피아노>는 20년 동안 영국 일간지 <가디언> 편집국을 지휘했던 앨런 러스브리저가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연주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는 기자로 일하기 시작하며 어린 시절 배웠던 피아노와 멀어졌지만, 중년에 이르러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40대 중반이라는 ‘인생의 오후’에 접어들면서 창조적인 자기표현, 융의 표현대로라면 ‘문화’를 위해 내 인생의 작은 부분을 별도로 떼어내 할애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줄리언 어산지의 위키리크스 사건과 찌라시 주간지 <뉴스 오브 더 월드> 폐간을 이끈 불법 도·감청 등 보도로 <가디언>의 존재감을 높이고 디지털 혁신을 이끌던 편집국장은 출근 전 20분씩 피아노를 연습했다. 그 바쁜 가디언 편집국장도 했는데 나라고 왜 못할까. 결국 최근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다. 20년 만에 건반을 다시 누르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집중하는 나’만 남았다.

매일 외국어 단어를 5개씩 외우고, 30분씩 체르니와 소나티네를 친다. 이를 위해 매일매일 직업생활도 더 열심히 수행한다. 인스타그램을 켜니, 봉에 매달려 폴댄스를 추는 동료도,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는 동료도 보인다. 새삼 이렇게 영혼을 돌보는 기자들이 많구나 싶다. 우리 이 힘으로 오래 일해요!

aza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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