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관광지니 당연히 맛집도 많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식당이 없.었.다. (…) 말이 돼? 부지런히 동네를 걸어 다녀봤지만 편의점 하나 없었다. 폭풍의 언덕에 이어 다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매일매일 관광객이 들어오는데 이토록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고?
영국의 유명한 관광지인 하워스 지역 브론테 목사관 박물관. 한국 사람들이 보기엔 신기할 정도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물이나 음료도 좀 챙기라는 내 말을 녀석들은 귓등으로 듣는 듯했다. 점심을 사기 위해 들른 가게에서 샌드위치냐 감자튀김이냐, 샐러드냐 그냥 맨빵에 잼이냐를 놓고 고민하느라 녀석들은 선생의 말 따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안 되면 가다 중간에 사도 되겠지, 나도 내 물 한 병만 달랑 사 출발했다. 목장길 따라 푸른 초원을 걸으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5월의 봄날답게 공기는 청량하고 햇살은 다사로웠다.
우리는 ‘폭풍의 언덕’에 가는 길이었다. 이틀 전에 영국 중부 요크셔 지방 하워스에 도착한 나와 학생들은 브론테 자매가 나고 자란 집에도 가보고 오밀조밀한 마을도 구경한 터였다. 사실 하워스가 브론테 자매들과 관련 있지 않다면 굳이 올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마을에 볼거리는 브론테 자매가 나고 자란 집이 유일하다. 원래는 목사관이었다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보존하는 작가들의 집을 보고 나면, 할 일은 없다.
그럼에도 마을에는 프랑스어, 스페인어, 독일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카페에, 기념품 가게에, 밥집에, 호텔에 옹기종기 도란도란 몰려다녔다. 한 이틀 있으니 동네 지도가 머릿속에 다 그려질 정도로 작은 마을에 이토록 다양한 여행자들이 몰려드는 건 <제인 에어>를 쓴 샬럿 브론테,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 때문일 것이다.
마을을 벗어나자 얕은 언덕이 물결치듯 나타났다. 끝없이 펼쳐지는 초록빛 초원을 따라 녀석들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다가 마음껏 달리기도 하고, 딩가딩가딩가 우쿨렐레를 치다가, 물을 마시다가 어, 물이 떨어졌네 탈탈 마지막 한 방울을 입에 털어넣었다. 가다가 물 사자, 라고 했지만 어쩐지 가게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쯤이면 편의점 하나 있을 법한테, 이쯤이면 카페 하나 나타날 만한데, 라고 생각했지만 맙소사, 끝끝내 물을 살 만한 어떤 곳도 나타나지 않았다.
두 시간쯤 걸어 급기야 우리는 언덕 꼭대기에 이르렀다. 다들 목이 말랐지만 마실 것이 없었다. 대신 바람이, 세상에나 바람이 온몸과 마음에 불어닥쳤다. 갈비뼈 사이로 등뼈 사이로 바람이 관통했다. 머릿속을 뚫고 들어가 뇌를 휘저어놓는 느낌이었다. ‘폭풍의 언덕’이란 말이 실감 났다. 한동안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무연히 서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떠들고 마는 녀석들이 입을 닫고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채. 바람의 소리, 풀의 소리만이 고원에 가득했다. 우리가 입을 다물자.
점심을 먹기 위해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을 펼쳤다. 물을 다 마셔버린 녀석들은 마른 입에 샌드위치와 감자칩을 밀어 넣었다. 물 한 방울이 이토록 귀할 줄이야. 두어 병 있는 물로 꼬약꼬약 점심을 먹으며 근데 어떻게 가게 하나가 없냐, 우리 같으면 오는 길에 분명 카페가 있는데, 녀석들이 떠들었다. 나도 그랬다. 카페나 하다못해 자판기라도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내 물만 달랑 한 병 산 것이다.
이토록 유명한 관광지에 이토록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다니. 뭐지 이 내공은?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그래서 여기가 더 폭풍의 언덕 같아요. 녀석 중 한명이 말했다. 여기에 레스토랑이나 찻집이 있으면 이 느낌이 안 날 거 같아요. 지인짜 폭풍의 언덕 같잖아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이제야 이해가 좀 되네. 쩝쩝 빵을 먹으며 웅얼거렸다. 불편하니 보이는 것들, 은 광막하면서 고즈넉했다. 돌아오는 길에 하늘이 어두워지고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비바람이 몰아쳤다. 우산 따위 소용없는 비바람 속을 녀석들은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꿈틀, 녀석들 안의 야생이 눈을 뜨는 순간이라고 믿기로 했다.
영국의 유명한 휴양지인 윈더미어 호수. 한국 사람들이 보기엔 신기할 정도로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하워스를 떠나 잉글랜드 북서부 윈더미어 지역으로 갔다. 영국에서도 유명한 호반 관광지는 소박하고 정결했다. 워즈워스 시인의 옛집에서 시를 읽거나, 주머니에 손을 꽂고 어슬렁어슬렁 작은 시내를 산책하거나, 피터 래빗 박물관을 구경하는 것이 우리의 주요 일정이었다. 한국에서도 친숙한 캐릭터인 피터 래빗을 탄생시킨 동화작가 비어트릭스 포터가 살았던 힐탑에 가보기로 했다. 오전 배를 타고 들어가 점심은 그곳에서 먹을 예정이었다.
힐탑은 작가로 유명해진 비어트릭스 포터가 40대 즈음에 살던 집 이름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농부이자 정원사이자 작가이자 야생동물 관찰자 혹은 보호자로 살았다. 비어트릭스의 정원에는 수선화와 접시꽃과 라일락을 비롯해 사과나무, 배나무, 당근, 감자, 양배추, 상추 등등 가지가지 채소와 허브가 공존했고, 그녀 책의 등장인물들인 쥐와 토끼와 오리와 오소리가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배에서 내리자 역시나 부드러운 구릉들이 아득히 펼쳐졌다. 포터가 살았던 이층집을 구경하고 그 옆에 달린 동네 문방구만 한 기념품점을 구경하고 나니 할 게 없었다. 아기자기 소품점들과 애프터눈 티를 파는 카페들이 줄줄이 있을 법한데, 아무것도 없었다. 점심이나 먹을까, 유명 관광지니 당연히 맛집도 많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식당이 없.었.다. 힐탑 바로 옆 레스토랑은 그날따라 문을 닫았다. 말이 돼? 부지런히 동네를 걸어 다녀봤지만 편의점 하나 없었다. 폭풍의 언덕에 이어 다시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매일매일 관광객이 들어오는데 이토록 아무것도 팔지 않는다고?
묘한 느낌이었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 팔 수 있는데 안 파는 것. 벌 수 있는데 안 버는 것. 그 저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 영국 여행 중 가장 알고 싶은 것이었다. 이들도 처음부터 그 내공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돈 되는 거면 산이든 강이든 들판이든 파고 헤집고 뒤집고 곳곳에 새로운 건물을 지었다 부쉈다 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멈추고, 멈추는 것이 산업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이 풍경을 그대로 둘 수 있는 힘이 생겼으리라.
비어트릭스 포터는 멈추는 것의 불안과 초조를 완화하는 데 기여한 인물이다. 1900년대 초반 개발자들이 호수 지역으로 밀려와 땅을 사들이던 시절, 포터는 피터 래빗 원화들을 팔아 주변의 땅과 농장을 사들였다. 사들인 농장과 땅은 그대로 원래 주인이 관리하도록 했다. 500만평에 달하는 이 땅은 그녀 사후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됐다. 조건은 단 하나,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그녀의 유언이었다.
있는 그대로 두는 것, 그 말에는 너구리, 돼지, 부엉이, 다람쥐, 여우와 대지를 공유하고, 꽃과 풀과 나무와도 함께 살며, 작은 시내가 모여 큰 강을 이루고 큰 강이 굽이쳐 바다로 나아가도록 두자는 마음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대로 둔 곳에서 내 학생들은 마음이 순해지고 몸은 활발해졌다. 할 수 있는데 안 하는 내공을 길러야 할 때다.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