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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초저출산 시대, 미리 쓰는 변명

등록 2023-03-16 18:34수정 2023-03-17 02:36

민주노총 청년 활동가들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를 향해 주69시간제 폐기를 촉구하며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민주노총 청년 활동가들이 지난 15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관리 우수 사업장 노사 간담회에서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를 향해 주69시간제 폐기를 촉구하며 기습시위를 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이지혜 | 경제팀 기자

“놀랍지도 않네. 쌤통이다.”

한국 합계출산율이 0.78명으로 또 세계 최저 기록을 깼다는 기사에 친구들이 보인 반응이다. 쌤통은 남이 낭패를 봐서 고소할 때 쓰는 말이니 한국인으로서 적절한 태도는 아닐 것이다. 전쟁이나 체제 붕괴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0점대 출산율’ 앞에 건전한 감정이 아닌 줄은 그들도 잘 안다. 하지만 내 또래인 20∼30대라면, 더군다나 여성이라면, 이 불온한 마음에 공감하고 이해하지 않을까.

이건 사실 억울함의 발로다. ‘요즘 애들’은 이기적이고 무책임해서 결혼도 출산도 안 한다고 믿는 기성세대에게 외치고 싶은 것이다. 이게 바로 당신들이 물려준 세상의 성적표라고. 노동자 근로시간은 세계 평균보다 연 200시간이나 길고, 기혼 여성 6명 중 1명꼴로 경력단절을 겪고, 복지지출 수준은 주요국 가운데 최하위권인 나라를 물려줘놓고 우리더러 어쩌라는 거냐고 따지고 싶은 것이다. ‘출산 파업’이 이만큼 성공적인데도 여성, 청년, 일하는 사람의 삶을 망쳐놓은 기성세대는 미동도 없으니, 내 가임기 안에 세상이 바뀌긴 어려울 성싶다.

최근 정부의 ‘주 최대 69시간 근로시간제’ 발표를 보고 나라가 망하려고 고사를 지내는구나 싶었다. 주 69시간이나 일하면 도대체 언제 연애하고 결혼하고 부모가 되라는 걸까. 정부안에 따르면, 연장근무 주엔 하루 최대 근무시간이 13.8시간(69시간/5일)인데, 직장인 평균 통근시간 2시간, 평균 수면시간 6시간을 빼면 자유시간은 겨우 2시간 남는다. 이 2시간은 밤늦게나 허락될 것이고 녹초가 된 채 겨우 청소기나 세탁기 돌리다 끝날 것이다. 그다음 주에 단축근무 시켜준들 무슨 소용이람? 밀린 잠 자느라 바쁠 텐데.

기성세대가 ‘지구 유일 0점대 출산율’을 보고도 끄떡없는 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구위기가 본격화되기 전 수명이 다해 홀연히 세상을 떠날 것이다. 병역자원 축소로 인한 국방 공백, 청년층 유출로 인한 지방소멸, 노동공급 감소로 인한 소비·투자 위축과 성장잠재력 악화, 노년부양비의 가파른 증가…. 이 살벌한 문제들은 오롯이 우리 세대의 몫이 될 것이다.

우리 세대는 문제를 짊어진 채 문제 그 자체가 된다. 지금 이대로라면 국민연금 적립금은 2055년에 소진될 전망인데, 1991년생인 나는 그 이듬해 65살이 돼 노령연금을 받기 시작한다. 지금 국민연금은 보험료 일부를 쌓아뒀다가 연금을 주는 부분적립식으로 운영되지만, 기금이 소진되면 매년 가입자에게 걷은 보험료로 수급자 연금을 주는 부과식으로 전환된다. 2055년 젊은이들은 내 연금을 위해 월급의 26.1%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내가 바로 30년 뒤 문제적으로 늘어날 노인 인구 중 1명이다.

30년 뒤 젊은이들이 자식 없는 노인들을 힐난하는 상상을 해본다. 왜 아이를 낳지 않았느냐고, 어찌 그리 무책임했냐고 질책당할 순간 말이다. 앞 세대의 힐난과 달리 다음 세대의 힐난엔 면목이 없을 것 같다. ‘나 때는’ 주 최대 69시간이나 일하고 집값도 너무 비싸서 힘들었다고, 미래고 나발이고 내 코가 석자였다고 항변해본들 그들에겐 꼰대의 변명일 뿐이다. 일하는 사람 10명이 노인 2.7명을 부양하는 지금도 어떤 젊은이들은 노인을 ‘틀딱충’ ‘연금충’이라 비하하는데, 일하는 사람 10명이 노인 9명을 부양하게 될 30년 뒤 어떤 잔인한 혐오가 우리를 찌를지 벌써 두렵다.

너무 때 이른 걱정일까? 아니라고 본다. 만일 우리가 지금 근로시간 유연화로 포장된 근로시간 연장을 가만히 지켜만 본다면, 여성, 청년, 일하는 사람의 삶이 이렇게 망가져만 간다면, 30년 뒤에도 전쟁에 준하는 저출산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30년 뒤에도 젊은이들은 생존에 허덕이고 부모 되기를 꺼리며, 전쟁 같은 세상을 물려준 골칫덩이 노인들을 욕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그 대물림의 고리를 끊어내고 싶다. 그것이 훗날 우리 세대 부양을 책임질 미래 세대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테니.

god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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