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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우진의 햇빛] 산에 가면 날씨도 들쑥날쑥

등록 2023-04-02 18:44수정 2023-04-03 02:04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우진 | 차세대수치예보모델개발사업단장

우리 주변에는 산이 많다. 영국에서 찾아온 방문객에게 서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게 뭐냐고 물었더니 도심에 산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래전 쌍문동에 사는 친구 집에 갔다가 아침에 나오는데 갑자기 눈이 부셨다. 도봉산 동편 자락이 햇살에 반사되어 황금색이 섞인 듯 반짝반짝 빛나고, 높게 솟은 봉우리는 하늘에 좀 더 다가선 만큼 정령들의 신비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산세에 막히고 나무에 가려 답답하다. 오르락내리락 오솔길을 따라가기를 반복하면 작은 능선에 이른다.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잠시 땀을 식히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한다. 제법 높은 고지에 이르면 키가 작은 관목이나 풀들이 대신 들판을 차지하며, 확 트인 전경이 펼쳐진다. 드문드문 서 있는 나뭇가지마다 추위와 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이리저리 뒤틀려 있다. 비가 그치면 금방 땅이 메말라 식물이 살기에는 척박한 곳이다.

한동안 벗어 놓은 재킷을 다시 주워 입는다. 바람이 제법 강하게 불고 공기도 싸늘해진 탓이다. 그러다가 정상에 오르면 사방이 발아래에 있다. 이제 바람은 모든 방향에서 번갈아 가며 불어댄다. 돌풍이 몰아칠 때마다 카메라가 흔들려 사진 찍는 데 애를 먹는다. 재킷은 목 위까지 단단히 동여매 바람을 막아본다. 차고 건조한 탓에 땀도 쉬이 마르면서 체온은 빠르게 떨어진다. 입산한 지 몇 시간 사이에 벌어지는 극심한 기상변화다. 정상에 오른 기쁨도 잠시. 달라진 날씨에 빨리 하산하고 싶다.

높이 올라가면 춥고 바람이 강한 이유는 뭘까? 같은 질문이지만 거꾸로 물어야 한다. 평지로 내려갈수록 따뜻해지고 바람이 약해지는 이유는 뭘까? 중위도 상공에서는 편서풍이 의례 강하게 불지만, 땅이 바람을 끌어당기며 지면 가까이 내려오면 풍속이 약해진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담그면 허리 부분은 물살이 세서 몸이 떠밀려가지만, 발끝은 유속이 작아 가만히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한편 대기는 가만 놔두면 복사 에너지를 방출하며 식어가기 마련이지만, 땅이 햇빛을 받아 열기를 전해주고 대기가 이불이 되어 그 열기를 한동안 보온해준다. 하지만 산에 오르면 평지에서 멀어지며 바람은 자유롭게 활개 친다. 공기가 희박해지며 대기의 보온 기능이 떨어진다. 햇빛이 끊기면 기온은 가파르게 하강하고 일교차가 크게 벌어진다. 강풍으로 체감온도는 더욱 떨어진다. 평지에서는 땅이 주는 안온함을 잊고 살다가, 산에 오르면 거친 대기의 원초적 본성을 마주하게 된다.

산의 모양을 닮아서인지 산 날씨도 들쭉날쭉하다. 능선을 따라 바람이 한데 모이면 맨홀 구멍으로 빗물이 역류하듯 기류가 분출하고, 낮이 되면 양지바른 사면마다 열 기둥이 솟아난다. 그래서 평지에서는 순탄한 날씨였는데, 막상 산에 오르면 갑자기 안개에 휩싸이기도 하고 요란한 폭풍우와 맞닥뜨리기도 한다. 백두대간은 산세도 험하지만, 계절풍이 가세하며 기상변화가 유독 심하다. 한국 전쟁 때 미해병사단은 날씨의 복병을 만나 고전했다. 중공군이 전쟁에 가담하며 흥남부두로 철수할 때까지, 포탄보다 동상과 저체온증으로 몇 배가 넘는 병사를 잃었다. 그 후 미국 서부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훈련 캠프를 설치하고, 고산 기후에 대한 적응 훈련을 확대하게 되었다.

바람이 땅의 지세에 순응하며 흘러왔듯이, 이 땅도 바람이 부는 대로 비나 눈을 맞는 대로 깎이며 다듬어져 왔다. 촉촉한 둘레길을 걸을 때는 부드러운 비와 이슬의 흔적을 느낄 수 있고, 반들반들해진 암반 기슭을 오르는 동안에는 바람의 거친 손자국을 그려 볼 수 있다. 우리는 산 날씨가 특이한 것을 보고 놀라지만, 날씨는 산과 그곳에 머무는 생명과 조화롭게 공존해가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가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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