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대법정 입구에 설치된 정의의 여신상.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종규 | 저널리즘책무실장
지난달 18일치 이 지면에
‘검찰에 ‘작업’ 당하지 않는 법조 보도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검사의 입에 의존하는 법조 취재·보도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한겨레>의 변화 의지도 천명했다. 그 뒤 한겨레 법조 기사들을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들여다봤다. 법조 보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검찰 수사 상황을 전하는 기사에 검찰뿐만 아니라 피의자를 포함한 사건 당사자들의 주장을 두루 반영하려는 시도들이 예전보다 훨씬 많이 눈에 띄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검찰 수사 대상자에게 유리한 정황도 기사에 적극적으로 담는 등 균형 잡힌 보도를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검찰의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 수사 기사(온라인)의 경우, 맨 앞쪽에 수사 배경 등 사건의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를 안내문 형태로 고정 배치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독자들이 체감할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 언론에 팽배한 ‘전지적 검찰 시점’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겨레가 2010년 시행한 ‘범죄수사 및 재판 취재보도 시행세칙’(이하 ‘세칙’)의 ‘반론 보장’ 항목에는 ‘반론을 기사에 반영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상황, 어떤 단계에서든 반드시 필요하다’고 규정돼 있다. ‘한쪽 주장을 길게 나열해 기정사실화한 뒤 짧게 반론을 덧붙이는 보도는 지양하고, 처음부터 충분한 반론을 반영한 종합적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검찰이 전한 혐의사실을 기정사실화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반론은 맨 끝에 짧게 붙이거나 아예 생략하곤 하는 한국 언론의 보도 관행에 대한 자성에서 나온 규정이다. 이런 점에 비춰 보면, 한겨레의 최근 변화 노력은 오히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박현 한겨레 뉴스룸국장은 지난 2월 말 이뤄진 임명동의 투표 과정에서 ‘세칙’을 엄정하게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검찰 중심의 법조 보도를 법원 공판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약속도 내놓았다. 그는 법조 취재 시스템 개편이 필요한 이유로 ‘신뢰 위기’를 꼽았다.
“신뢰 위기가 그 전부터 있긴 했지만 ‘편집국 간부 금전거래 사건’으로 한겨레는 신뢰에 큰 타격을 입었다. 한겨레 법조 기사에 대해 독자들이 불신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3월30일, 한겨레 후원회원 전용 뉴스레터 인터뷰)
박 국장이 ‘엄정 준수’를 다짐한 ‘세칙’은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제정됐다. 당시 검찰의 수사를 받던 노 전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하자, ‘먼지 털기’ ‘망신 주기’ ‘별건 수사’ 등 검찰의 낡은 수사 관행에 대한 비판 여론이 비등했다. 검찰이 흘려준 말을 검증 없이 받아쓰는 보도 행태도 도마에 올랐다. 세칙은 이런 비판에 대한 한겨레 내부 성찰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세칙은 사규집에만 존재하는 ‘죽은 문서’가 됐다.
세칙에는 충분한 반론 반영 외에도 예단과 과잉보도의 지양, 어느 한쪽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 취재, 교차검증 등의 취재·보도 원칙들이 담겨 있다. 정확하고 신중한 보도는 물론, 막강한 권력을 지닌 검찰을 견제하고 감시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규범들이다.
세칙이 가장 강조하는 건 재판 보도의 중요성이다. 세칙은 “범죄의 증거, 피고인과 수사기관의 견해 등은 법정에서 공개되고 상호 검증되기 때문에 수사 때보다 재판 과정에서 사건의 전모가 규명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재판 과정과 결과를 적극적으로 취재 보도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법조 보도의 무게중심이 수사에서 공판으로 옮겨져야 할 이유는 자명하다. 무엇보다 검찰 수사 과정은 현저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검사들은 광범위한 압수수색과 참고인 조사 등을 통해 확보한 정황들을 무기로 피의자를 압박하고 범죄 구성에 유리한(피의자에게 불리한) 진술을 끌어낼 수 있다. 반면 피의자는 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 맥락을 알 길이 없는 수많은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와 달리 재판 과정에선 검사와 피고인이 대등한 지위에서 유무죄를 다툰다.(무기 평등의 원칙) 검찰이 작성한 조서는 법정에서 당사자가 부인하면 유죄의 증거로 쓸 수도 없다. 더욱이 우리 헌법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규정돼 있다. 이런 점에서, 수사 단계에서 검찰이 흘린 파편적인 진술을 검증도 없이 대서특필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관행임에 틀림없다.
한겨레 저널리즘책무위원회 외부 위원인 이승선 충남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최근 한겨레에 보내온 ‘책무실 통신’에서 법조 보도 변화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법조 기자단’으로 얽히게 돼 결국 치명적인 신뢰의 손상을 입은 한겨레로서는 아니 갈 수도 없는 방향이 ‘법원 재판 중심 보도’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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