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인데스크 코리아> 취재진이 지난 14일 가상자산 예치 서비스 ‘하루’(haru) 운영사인 하루인베스트 사무실을 찾았으나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코인데스크 코리아 제공
[뉴노멀] 김기만 | <코인데스크 코리아> 부편집장
가상자산(암호화폐) 업계에서 자주 쓰이는 말 중 ‘러그풀’이란 용어가 있다. 양탄자(rug)를 갑자기 잡아당겨(pull) 그 위에 선 사람을 넘어뜨린다는 뜻에서 유래됐다. 주로 가상자산 시장에서 개발자가 프로젝트를 갑작스럽게 중단하거나 잠적해 투자금을 훔치는 형태의 투자사기를 뜻한다. 토큰 발행이나 투자 유치로 자금을 조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 가상자산 시장에서 러그풀이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최근 국내 가상자산 운용사들이 돌연 입출금 서비스를 중단하면서 투자자들 사이에서 러그풀 불안이 확산되고 있다. 지난 13일 국내 2위 업체인 ‘하루인베스트’가 입출금을 중단한 데 이어 다음날인 14일 국내 1위 업체인 델리오도 출금을 중단했다. 특히 하루인베스트는 사무실을 폐쇄하고 관계자들이 잠적하면서 투자자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두 회사는 모두 “러그풀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하고 있다. 하루인베스트는 위탁을 준 운용 파트너가 손실을 내면서 고객에게 돌려줄 자산에 손실이 발생했고, 델리오는 고객 자산을 하루인베스트에 맡겼다가 못 받는 상태로 알려졌다. 가상자산 운용사들의 연쇄 부실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가상자산 운용사들은 고객들이 가상자산을 예치하면 이를 운용해 고객에게 수익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제공해왔다. 특히 하루인베스트는 비트코인, 이더리움, 테더 등을 예치하면 연 최대 12%의 이자를 준다고 홍보해 인기를 끌었다. 2019년 서비스를 시작해 140개국에서 8만명의 이용자를 모았다. 누적 거래액은 22억7천만달러(약 3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는 이런 서비스가 규제 사각지대에 있다는 점이다. 하루인베스트는 싱가포르에 법인을 두고 주로 국내에서 사업을 펼쳐왔다. 가상자산사업자(VASP) 신고도 하지 않아 금융당국의 감독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엄격한 규제를 받는 가상자산 거래소와 달리 가상자산 운용사들은 신고 의무가 없기 때문이다. 투자자들이 맡긴 자산에 손실이 발생할 경우 이를 구제하기 쉽지 않다는 의미다.
델리오는 가상자산사업자로 등록돼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FIU)의 관리 감독 대상이다. 하지만 가상자산 운용이 아닌 가상자산의 이전 및 보관 사업자로 인가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규제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었던 셈이다.
현재 국회에서 본회의 통과를 앞둔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이 시행된다고 해도 이번 사태는 막기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용자보호법은 시세조종 등 불공정거래행위에 대한 규율을 뼈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자산거래소의 책임 강화에 초점이 맞춰진 반면, 이번 사건이 발생한 가상자산 운용사 등에 대한 규제는 빠져 있다. 지난달 유럽연합(EU) 이사회가 승인한 암호자산시장법(MiCA, 미카)에서 가상자산사업자의 라이선스(허가)를 세분화해 각각의 조건들을 정의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가상자산의 발행과 유통, 공시 등 시장 전반을 다루는 기본법은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올해 안에 가상자산 기본법이 제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입법 공백기 동안 얼마나 더 많은 러그풀이 발생할지 우려가 되는 부분이다.
가상자산 시장에서는 ‘디와이오아르’(DYOR)라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Do Your Own Research’의 앞글자이다. 투자자는 자신이 투자하려는 상품에 대해 직접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모든 투자에 해당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규제 사각지대에 있는 가상자산 투자에 더욱 크게 와닿는 말이다.
하지만 투자자들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의도적인 러그풀을 막기는 쉽지 않다. 국회의 조속한 입법과 정부의 규제 마련이 시급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