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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기복이의 커밍아웃

등록 2023-06-27 18:39수정 2023-06-28 02:38

기복이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자 그의 여사친들은 태산같이 그를 염려해 돌아가며 면회를 다니곤 했다. 기복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군대에 늦게 간 이유는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의 찰지고 옴팡진 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군대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 이곳의 지옥을 견디게 하니까.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일러스트레이션 김우석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오늘이 그날이군, 기복의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학기 초에 기복은 나를 찾아와 커밍아웃하고 싶다고 말했다. 입학하고 두 학기를 보내고 세번째 학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그러고 싶다면 그리하라 대답하고 지금 커밍아웃하는 이유가 있냐고 물었다. 자유롭게 글을 써보고 싶다고 기복은 대답했다. 남미여행을 앞두고 있었고 다녀와서는 책을 출판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었다. 기복은 커밍아웃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자꾸 빙빙 돌려서 말하게 된다고 했다. 은유와 암시 말고 명징하고 선명한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데 그러려면 어떤 말들을 가둔 빗장부터 풀어야 할 것 같아서요. 내 글이 설득력과 개연성을 갖추려면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할 거 같아요. 공적인 공간에서.

글이라는 게, 그렇다. 나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된다. 1년을 같이 보낸 친구들이니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지만 예정대로 책이 출판되고 여러 사람에게 노출되면 노골적인 편견이나 난관에 부딪칠 수도 있다고 말하자 기복은 감당해보겠다고 말했다.

기복은 글쓰기 시간을 ‘그날’로 잡은 모양이었다. 커밍아웃과 관련한 직접적인 글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니까 여전히 은유와 상징의 문장들이 가득했으므로, 그의 동기들은 심상한 표정으로 합평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은 기복의 글부터 시작합시다. 이 글은 커밍아웃에 관한 글로 읽힙니다. 내 말이 끝나자 찌리릿, 긴장이 발생했다. 다들 후다닥 다시 기복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한참의 침묵을 깨고 덕이 말을 시작했다. 음, 많이 고민하고 망설이다 썼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어쩐지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복이 우리를 신뢰한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안네가 말을 이었다. 아, 속이 시원하네요. 사실 저는 첫 학기에 기복이 말해줘서 알았어요. 저랑 기복이랑 사귀는 거 아니냐고 여러분이 말할 때마다 제가 콧방귀를 뀌었던 걸 이제는 아시겠지요? 아, 어쩐지 하는 표정으로 모두 안네를 바라보았다. 그 와중에 채기가 쿨쩍쿨쩍 눈물을 찍어냈다. 이 분위기 어쩔? 하는 표정으로 모두 채기를 바라보았다. 너무 미안해서요. 툭하면 게이 같다고 기복이를 놀렸거든요. 으흥. 너무 미안해요. 지용이 재빨리 나섰다. 됐고요, 나는 게이 친구를 두는 행운과 호사를 누리게 돼서 좋습니다. 그리고 게이이든지 아니든지 기복이는 기복이, 아니겠습니까.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모두 한마디씩 하는 동안 기복은 고개를 숙인 채 경청했다. 미동도 않고 앉아 있었지만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여러분은 달라지는 게 없겠지만 기복이는 달라지는 게 많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특히 아우팅하는 경우에는요. 아우팅이 뭔지는 알지요?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 등을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타인이 드러내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악의 없이 혹은 실수로 지인, 그러니까 부모님이나 선후배, 이 자리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기복의 성정체성을 이야기한다면 기복이에게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걸 명심합시다. 명예훼손죄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모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뒤 오란이 찾아왔다. 기복이한테 고백하려고 하는데 안 되나요? 어, 무슨 말이야? 얼떨떨해서 물어보자 오란이 훌쩍였다. 기복이 좋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커밍아웃해버린 거거든요. 그래도 고백하면 안 될까요?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음, 흥미로운 전개지만 기복이로선 난감할 거 같은데. 사랑하는 사람을 곤경에 빠트리지 않는 게 좋을 거 같아. 오란은 뚝뚝 눈물을 흘리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기복이는 여자들과는 우정을, 남자들과는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니 우정을 잘 쌓아가보도록 해요.

커밍아웃 뒤 기복의 글은 조금 자유로워지고 분명해졌다. 20세기 끝자락에 태어난 나와 친구들은 ‘폴리아모리’를 모던으로 알고 컸다. 일부일처제, 가부장제, 독점적 사랑에 반대하는 일이니까 쉬웠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으로 새로운 시대가 왔으니 쿨한 사랑을 꿈꿨다.

친구들―어쩐 일인지 그해 로드스꼴라에는 여자 학생들의 비율이 높아 기복의 동기들은 대부분 여자 학생이었다―은 때로는 웃음을 참아가며 때로는 진지하게 그의 글을 읽고 논평했다.

처음으로 나와 그녀들 사이의 오해가 걷히는 기분이었다. 1년 넘게 서로의 글을 읽어주는 사이였지만 내 글이 처음 제대로 읽힌다는 기분이었다. 솔직함의 힘을 그때 느꼈다. 어떤 문제든 먼저 터놓고 직면해야 이해와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는 사실을 늦게 깨달았다. 가끔 이성애를 비꼬고 뒤틀고 구박하는 글을 써 갔는데 그녀들은 재밌다고 말해줬다.

독자는 작가를 용감하고 결연하게 만든다. 남미여행을 마치고 우리는 예정대로 책을 냈다. 기복의 글도 물론 수록됐다.

엄마, 남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일은 죄가 아니겠죠? 어떻게 그게 죄가 되는지 알 수 없어서 지난 몇년 동안 여행을 다니며 세상을 방황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모르파티(amor fati)라는 말이 있습니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다. 남미여행을 하고서 저는 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알게 된 기분입니다.

기복이 늦은 나이에 군대에 가자 그의 여사친들은 태산같이 그를 염려해 돌아가며 면회를 다니곤 했다. 기복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군대에 늦게 간 이유는 그녀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녀들의 찰지고 옴팡진 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군대에서 죽었을지 모른다. 다른 세상에 대한 상상력이 지금 이곳의 지옥을 견디게 하니까. 그녀들의 빛나는 세계는 힘들고 외로웠던 병영 안에서 또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해주었다.

서울퀴어문화축제가 6월22일부터 7월9일까지 서울 도심과 온라인 곳곳에서 열린다. 24년이라는 오랜 역사를 가진 민간 축제다. 3만~4만명 참가자들이 오가는 그야말로, 페스티벌이다. 그중에는 기복과 기복의 친구들이 있을 것이고 퍼레이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시끄럽고 번다하고 고성이 오가는 퀴어문화축제의 한가운데, 한국 사회의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의 지표를 확인해볼 수 있는 최전선의 현장을 보고 싶다면 퀴어퍼레이드가 열리는 을지로에 가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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