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온타리오주의 크로퍼드 호수는 인류세의 대표 물질을 퇴적층에 간직하고 있다. 인류세실무그룹 제공
남종영 | 기후변화팀 기자
몇년 전 아이가 열이 40도 넘게 끓어올라 대학병원 소아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문 앞에서 “밤 당직 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운 좋게도 해열제 교차복용으로 열을 잡아 가슴을 쓸어내린 밤이었다.
최근 뉴스를 보고 그 이유를 알았다. 응급실 당직을 설 수 없을 정도로 소아청소년과 전문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져 올해 상반기에는 전공의 모집 정원의 16%밖에 지원자가 없었다고 한다.
며칠 전 한 고등학교 선생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출산율 감소나 낮은 의료수가 말고도 ‘진짜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줄었기 때문 아니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다. 요즈음에는 스카이(SKY)대 같은 명문대 간판은 옛말이고, 수도권·지방을 불문하고 ‘의치한’(의대·치대·한의대)부터 점수 좋은 학생들이 먼저 채운다는 거였다. 히포크라테스 정신과 사명감에 끌려 의사를 선택한 게 아니라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일자리로 생각하는 세태가 그만큼 심해졌다는 것 아닐까?
마음이 착잡한 와중에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옛말에 영고성쇠(榮枯盛衰)라는 말이 있죠? 나라가 영화로워도 백성은 메마르고, 나라가 성해도 백성은 쇠한다고요.”
원래 흥하다 망하고 망하다 흥하는 게 세상 이치란 뜻인데, 살짝 바꾸어 풀이한 게 울림이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한 시대를 사는데, 왜 우리는 메마르고 건강하지 못한가? 우리는 최고로 부자이지만, 왜 최악으로 빈곤한가? 왜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괴롭히며 경쟁하는가?
엉뚱하게도 이런 시대야말로 ‘인류세’를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존층을 발견한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은 과도한 인류 활동이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을 바꿔 현 지질시대인 ‘홀로세’의 평형상태를 벗어나 ‘인류세’로 진입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지질학자들에게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져 1950년대가 그 시점으로 제안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왜 하필 1950년대인가? 1950년대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소비자본주의가 시작된 시기다. 플라스틱이 물건의 재료가 돼 값싼 소비재가 범람하기 시작한 시대다. 서구에서 가난한 사람들도 전화와 라디오, 텔레비전을 소유하게 된 시대다. 공장식 축산으로 생명이 대량으로 생산·도살돼 모두가 값싼 고기를 먹게 된 시대다. 이 모든 걸 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로 만들고 작동하게 한 시대다. 미국의 과학저널리스트 수전 프라인켈은 “모두가 누릴 수 있는, 민주적 사치의 시대”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1950년대는 부유하며 쇠락하는 영고성쇠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마치 자동차의 액셀을 세게 밟듯 인류의 활동과 지구의 변화에 거대한 가속이 붙어, 이때부터 지금까지를 ‘대가속기’라고도 부른다. 1950년대를 인류세의 시점으로 처음 제안한 이는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지구시스템 과학자 윌 스테픈이다. 그는 지구 시스템 지표 12개와 사회·경제 지표 12개를 볼 때, 지구가 질적으로 변화한 시기는 산업혁명이 아니라 대가속기라고 주장했다. 온실가스 농도는 18세기 이후 완만하게 상승하다가 1950년대부터 솟구친다. 해양 산성화, 열대우림 손실, 토지 개간의 정도도 마찬가지다. 인구와 대형 댐의 수, 물 사용량 등 사회·경제 지표도 급발진한다.
인류세는 두번의 투표를 거쳐 내년 부산에서 열리는
국제지질학총회에서 최종 비준된다. 1950년대를 시점으로 보고,
캐나다 크로퍼드 호수를 대표지층 격인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으로 하는 안이다. 이 호수 퇴적층은 플루토늄 같은 핵실험 흔적과 화석연료 발전소에서 배출되는 구형탄소입자(SCP)를 선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플라스틱도 인류세의 보조적 표지(마커)로 거론된다.
범람의 시대에는 쓰고 버리는 게 쉽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이 관계도 그렇게 닮아간다. 동시에 우리는 일회용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분투한다. 살아 있는 것을 죄책감 없이 죽이고 먹는 행위, 힘없는 비인간 동물을 착취하는 행위도 일상화된다. 이러한 것들이 다 ‘물건’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물건이 범람할수록 우리 마음은 거칠고 공허해진다. 부유한데 가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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