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빈대의 히치하이킹을 막는 법 [남종영의 인간의 그늘에서]

등록 2023-11-08 18:36수정 2023-11-09 02:10

빈대는 인간의 냄새와 열 그리고 호흡을 통해 나오는 이산화탄소 농도를 감지한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조명이 꺼지면 빈대는 먹이 활동을 개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빈대는 인간의 냄새와 열 그리고 호흡을 통해 나오는 이산화탄소 농도를 감지한다.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고 조명이 꺼지면 빈대는 먹이 활동을 개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종영 | 환경논픽션 작가

최악의 여행이었다.

10년 전 가을밤, 미국 알래스카 앵커리지행 비행기를 탄 나는 데날리국립공원에서 트레킹을 하고 야생동물을 관찰할 꿈에 부풀어 있었다. 오랜만에 혼자 떠난 여행이었다. 하지만 새벽에 도착해 몇시간이라도 눈 붙이고자 저렴한 호스텔을 예약한 게 화근이었다.

이튿날, 데날리국립공원으로 차를 몰고 가는데, 오른쪽 손에서 한땀 한땀 바느질하듯 붉은 반점이 돋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점은 도로를 낸 듯 차례로 얼굴까지 올라갔다.

여행자들에게 악명 높은 빈대에 물린 게 틀림없었다.(혈관을 잘 찾지 못하는 빈대는 바느질하듯 두세 방을 연달아 물며 나아간다) 공포가 엄습했다. 내가 호스텔에서 머문 게 몇시간이었더라? 옷가지를 카펫 바닥에 던져 놓았던가?

가려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손을 덜덜 떨며 인터넷을 찾아보니, “여행가방을 포함해 모든 걸 버려라”, “바르는 약으론 턱도 없다. 가장 강력한 항히스타민제를 복용하라”는 등 지옥을 다녀온 경험자들의 충고가 있었다.

그런데, 여기는 알래스카 아닌가. 가장 가까운 약국도 80㎞ 떨어져 있었다. 숙소에서 미친 듯이 ‘삶음’ 세탁을 돌린 뒤, 약 세알을 사기 위해 한시간을 달렸다. 모든 일정을 포기했다. 알래스카 여행은 빈대와 함께 그렇게 날아갔다.

가장 큰 걱정은 이놈이 한국 우리집까지 따라오는 것이었다. 경험자들 의견은 분분했다. ‘큰 걱정 마라. 빈대는 여행가방에 들어가도 항공기 화물칸에서 생존하지 못한다’, ‘무슨 소리냐? 그럼 왜 빈대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냐?’, ‘저가항공이 대중화되면서 빈대가 퍼졌다’ 등등.

한때 맹독성 살충제 디디티(DDT)에 의해 현저하게 줄었던 빈대가 왜 다시 유행한 걸까? 과학자들도 깔끔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빈대는 모기처럼 날지 못하고, 이처럼 사람에 기생하지도 않아 이동능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자신의 은신처(침대나 가구 틈)에 온종일 지내다가 사람이 들어오고 불이 꺼지면 득달같이 달려가 피를 빨고 다시 돌아가는 ‘귀소 본능’을 가졌다. 플라스틱이나 합성섬유로 만들어진 여행가방도 은신처로 적당하지 않다.

2017년 영국 셰필드대 빈대 연구자인 윌리엄 헨틀리가 수수께끼의 커튼을 열어 젖혔다. 그가 주목한 건 여행가방 속의 빨랫감이었다.

그는 침실 크기의 방 하나에 땀에 밴 옷가지가 놓인 여행가방을 두고, 다른 방에는 세탁한 옷가지를 여행가방에 두었다. 그리고 빈대를 풀어놓았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빈대는 더러운 옷가지에 몰려들었다. 깨끗한 옷가지에 견줘 두배나 많은 수였다. 그 이유는 냄새 때문이었다. 빈대는 인간 피부에서 나오는 104가지 휘발성 화학물질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산화탄소 농도도 달리 해보았는데, 농도가 높을 때 더 많은 빈대가 은신처에서 기어 나오는 것으로 관찰됐다. 빈방에 사람이 들어와 잠을 자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진다. 농도의 상승은 빈대에게 육상경기의 신호총 같은 역할을 한다. 빵! 출발하라, 빈대여! 인간의 열과 냄새를 찾아라. 거기에 맛있는 음식이 든 혈관이 있다.

알래스카에서 나의 마지막 과업은 대형마트에 들르는 것이었다. 여행가방과 옷가지를 죄다 버리고, 새 부대에 새 옷으로 짐을 싸서 ‘새 출발’했다. 다행히 빈대는 그 뒤부터 ‘빈대 붙지’ 않았다. 한국의 우리집도 무사했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연구팀은 2004년 ‘미국국립과학원회보’에 과거 일부 이누이트의 포경경제가 일정 기간 지속하다 환경적 임계점에 이르면 낭비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고 밝혔다. 마을 앞으로 회유하는 고래를 마구잡이로 잡아 개체 수가 줄고 각종 쓰레기로 주변 호수가 부영양화되면, 마을을 아예 버리고 새 거주지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남용하고 투기하라’가 인간 문명의 특성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알래스카에 버려두고 온 여행가방과 옷가지를 생각하면 개운치 않다. 그럼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은 언제든 있다. 숙소에 도착해 여행가방을 풀 때마다 기억하라. 옷을 벗거든 밀봉할 것. 그리해야 재앙을 막을 수 있다. 나와 지구와 환경을 위하는 길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우리 엄마가 ‘백종원’으로 변했어요~ 1.

우리 엄마가 ‘백종원’으로 변했어요~

서서히 옛말이 되어갈 명절 증후군 [유레카] 2.

서서히 옛말이 되어갈 명절 증후군 [유레카]

“추석 응급의료 큰 불상사 없었다”며 자화자찬할 때인가? [9월19일 뉴스뷰리핑] 3.

“추석 응급의료 큰 불상사 없었다”며 자화자찬할 때인가? [9월19일 뉴스뷰리핑]

[사설] ‘김건희’에서 멈춘 대통령 관저 감사, 김 여사 눈치 보나 4.

[사설] ‘김건희’에서 멈춘 대통령 관저 감사, 김 여사 눈치 보나

스몰 웨딩 말고 스몰 비혼식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5.

스몰 웨딩 말고 스몰 비혼식 [이명석의 어차피 혼잔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