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 앤더슨의 영화 ‘로얄 테넌바움’ 한 장면.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웨스 앤더슨의 기이한 가족영화 ‘로얄 테넌바움’(2001) 마지막 장면에서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난 로얄 테넌바움의 묘비는 이렇게 새겨졌다. ‘침몰 직전의 전함에서 가족을 구출하려다 비극적으로 전사하다, 로얄 테넌바움(1932~2001)’. 시대로 보나 그의 성정으로 보나 도무지 말이 안되는 문구다. 콩가루 가족이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 말대로 그의 유언을 쿨하게 들어준 것이다.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그의 허영심과 가족을 꾸리는 일에 대한 생전의 실패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적절한 부고 한 줄이기도 하다.
월스트리트저널 부고 담당기자가 쓴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는 자신의 부고를 직접 써보라고 한다. 물론 로얄 테넌바움처럼 진솔한 거짓말을 쓰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저자는 구체적인 조언을 여러가지 주는 데 그중 눈길을 끄는 건 ‘인생 최대의 실수는 무엇인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점이 있는가?’ 같은 부정적인 질문도 자신에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밥 한 끼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라도 부고에는 덕담을 한 줄 걸치려는 게 인지상정인데 자신의 실수나 실패를 냉정하게 들여다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남 앞에서 쉽게 인정할 수 있는 실수란 ‘그때 집을 샀어야 하는 데’ 정도인데 부고에 ‘아파트값이 오르기 전에 집을 사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조언은 요즘 내가 봉착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중년에 이르고 나이듦에 대한 칼럼에서 마치 현자라도 된 양 이러쿵저러쿵 쓰지만 과연 나는 51살 먹은 나 자신을 얼마나 직시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오십이 넘어도 주기적으로 밀려오는 불안은 줄어들지 않고, 선택은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인생에 단 하나의 답이 있는 것처럼 목소리 올리는 사람들은 딱 질색이지만 ‘우물쭈물하다가 이 꼴 날 줄 알았지’로 오역됐다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내 것이 되지 않을까 싶다.
나 자신에게 정직해진다는 것, 내 실수나 어리석음, 부끄러움을 직시한다는 건 할리우드 영화에서 사형수를 무죄 판결로 이끄는 증언보다 어려운 일이다. 회피하고 싶기도 하다. 적어도 지구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남 탓하고 깎아내리는 데 인생을 바치느라 자신의 실수 따위는 아랑곳없이 평화로운 삶을 마무리한다. 하지만 삶이 어떤 미로에 갇혀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불안이 든다면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내 안의 어둡고 깊은 우물을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다.
최근 나온 최현숙 작가의 ‘두려움은 소문일 뿐이다’를 헐레벌떡 찾아 읽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엄마의 마지막 3년을 쓴 ‘작별 일기’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꾸미거나 가리고 싶은 내 역사의 일부인 ‘엄마’를 냉정할 만큼 솔직하게 기록했는데 이 산문집에서는 그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린다. 그는 어린 시절 엄마의 일수놀이 심부름을 하면서 생긴 도벽이 대학 때 친구 돈을 훔치다 발각되면서 견뎌야 했던 ‘망신의 시절’과 사춘기 때 액취증으로 ‘냄새나는 존재’가 되면서 겪어야 했던 수치심과 모멸감에 대해 꼼꼼히 적는다.
그는 타인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백인 젊은 시절의 ‘무저갱’(한번 떨어지면 헤어나지 못한다는 바닥이 없는 구렁텅이)을 굳이 책에서 “까발린”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우선 나부터 좀 후련해지기 위해서고, 까발려야 제대로 통과하기 때문이며, 내 사례를 통해 혹 각자가 처해있는 수렁과 두려움에서 직립하여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자는 제안을 하고 싶어서다.”
까발려야 제대로 통과한다. 최 작가만큼 혹독한 이십대를 겪지 않았어도 고인 물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고 인생의 단계를 통과해 제대로 된 부고를 쓰려면 까발려야 한다. 물론 까발린다는 게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치심을 익명의 타인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닐 터이다. 나이 들어 인생의 참의미를 찾아 나서기 전에 나의 치사함, 졸렬함, 속물성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지금 허우적거리는 고인 물을 통과할 수 있고, 인생의 다음 단계에서 진심으로 웃을 수 있으며 괜찮은 부고를 남길 수 있을 거 같다. 괜찮은 부고를 남기는 게 왜 중요하냐구?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의 저자는 말한다. “부고마저 재미없다면 죽는 데 무슨 낙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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