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빙: 어떤 인생’의 한장면. 30년을 공무원으로 지낸 주인공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무력했던 삶을 바꿔보려고 애쓴다. 티캐스트 제공
김은형 | 문화부 선임기자
엊그제 열두살 아이들에게 ‘20년 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를 인터뷰한 교육방송 동영상 클립을 우연히 봤다. “밤 11시까지 야근 중” “편의점 알바하면서 조기축구”까지는 ‘현실 감각 오지네ㅋㅋ’ 하면서 보다가 갑자기 눈물이 쑥 나왔다. 갱년기 호르몬 이상인지, 때마침 흘러나오던 크리스마스 캐럴 때문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전쟁과 직업과 물가와 무엇보다 돈 걱정, 그로 인해 재미없고 힘든 인생을 견뎌야 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푸틴도 네타냐후도 윤석열도 아닌 내가 왜 이 시점에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껴야 하나라며 열 받았지만, 사실 이런 아이 1인 추가에는 분명 내 책임도 있다. 지각하고 숙제 안 하는 아이에게 매일 퍼붓는 이야기가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과 각자도생에 관한 일장연설이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영화 ‘바비’의 주인공처럼 아침마다 눈 뜨며 ‘오늘은 또 무슨 일이 나를 기다릴까?’ 신이 날 수는 없다. 기자라는 특수직종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회사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회사와 언론과 한국사회의 미래가 아니라 당장 대출금부터 걱정된다.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척하는 게 중요하다”고 술자리에서 줄곧 시니컬한 농담을 하던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장인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하지만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평생을 이렇게나 당연시하는 게 당연한 걸까. 이러다 죽을 때 자식에게 “너 키우려고 지긋지긋한 일을 몇십년 동안 해오며 살았다”고 유언을 남겼다가 “누칼협(누가 그러라고 칼 들고 협박함)?”이라는 말을 들으며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
최근 개봉한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은 어느덧 사무실에 앉아 있는 내가 책상인지 의자인지 사람인지 구별 안되는 물아일체에 접어든 중년의 마음을 두드린다. 원작인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처럼 1950년대 배경인데 21세기에도 보는 이를 긴장시키는 질문을 던지는 걸 보면 나이듦과 삶의 의미는 세대를 넘어선 인생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있는 화석 아닐까 싶은 30년차 공무원 윌리엄스는 시한부 암 선고를 받는다. 평생 열심히 일한 게 전부인지라 이런저런 일탈을 해보지만 마음 둘 데를 찾을 수 없다. 그러던 중 부서간 떠넘기기 무한반복 속에서 서랍에 처박혀 있던 빈민가 주부들의 민원, 위험하고 좁은 공터에 놀이터를 지어달라는 요청을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소박하기도 하지. 이십대 때 어설프게 사회과학 학습을 한 엑스(X)세대 후유증인지 십년 전만 해도 소박한 보람, 소박한 기쁨 같은 단어를 싫어했다. 얄팍한 선심으로 자기 위안이라니 쯧쯧…. 원작 ‘이키루’에서도 죽음을 맞이한 주인공 와타나베의 상가에 모여 놀이터를 짓기 위해 그가 기울였던 노력을 깎아내리는 동료들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다. 그런 그들은 가슴 속에 ‘대도무문’을 대형 궁서체로 새겨넣고 책상 앞 화석으로 은퇴를 기다릴 것이다. 소박한 보람 따위 중요하지 않다며 아무런 보람 없는 삶을 마무리하겠지.
‘리빙: 어떤 인생’은 가즈오 이시구로가 시나리오를 썼는데 원작에는 없는, 윌리엄스가 젊은 직장 후배에게 남긴 편지가 나온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 그런가 포스트잇에 써 붙이고 싶을 만큼 심금을 울린다. “어떤 목표를 위해 매일 애쓰는 건지 확신할 수 없는 날들이 찾아오면 (…) 우리의 작은 놀이터가 완성된 순간에 느꼈던 소박한 보람을 떠올려보길 바랍니다.”
분명 월급이, 앉아있을 책상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었을 텐데 어느새 시작할 때의 다짐 같은 건 닳고 흐려진다. 때로는 무기력을 현자의 깨달음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두 주인공은 죽음이 임박해서 무기력한 성실성으로 보낸 헛된 시간을 자각한다. 그들을 어리석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인생의 막다른 국면에 도착해서 소박한 보람의 가치를 깨닫는 사람은 그래도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자신의 삶이라는 영화에서도 단역으로 밀려나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시한부 선고를 받기 전, 다가올 죽음을, 잃어버린 목표 앞에서 떠올릴 수 있는 소박한 보람을 생각하며 한해의 마무리 잘하시길!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