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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슬기로운 기자생활] 아무튼, 휴가

등록 2023-08-03 18:30수정 2023-10-18 15:21

지난달 28일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앞에 놓인 안내판. 박지영 기자
지난달 28일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츠빙거 궁전 앞에 놓인 안내판. 박지영 기자

박지영 | 이슈팀 기자

이번 여름휴가를 위해 올해 초 큰 맘 먹고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50대 중반인 엄마와 엄마 친구 3명 그리고 20대 엄마 친구의 딸(엄친딸) 1명과 함께. 이들과 여행을 간다는 내게 ‘굳이 왜?’ 이해 가지 않는다고 한 지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막상 나선 여행길은 기대 이상으로 흥미로웠다. 세대와 직업이 다른 사람들과 낯선 땅에 도착하니 여행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도 제각각 다르단 걸 새삼 느꼈다.

최근 맨발 걷기, 이른바 ‘어싱’(Earthing)에 빠진 엄마는 풀밭만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운동화와 양말을 벗곤 “독일 땅에서 맨발로 걸으니 후련하다”며 즐거움을 만끽했다. 꽃이라면 무조건 좋아하는 엄마 친구 ㄱ아줌마는 관광지마다 보기 좋게 심어진 화려한 꽃들은 물론, 골목길 아무렇게나 핀 들꽃들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연신 “아름답다”고 감탄했다. 건축 디자이너인 엄친딸 ㄴ은 독일 박물관이나 미술관 건물, 집 구조 등을 눈에 담으며 우리에게 깨알같은 건축 지식을 설명해주곤 했다.

“넌 여기 와서도 그런 게 눈에 보이는구나.” 여행 중반 무렵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의 츠빙거 궁전 관광 안내판 앞에서 엄마가 건넨 말이다. 휴가 직전까지 장애인 관련 취재를 해서 그런 걸까. 수리 중인 츠빙거 궁전의 휠체어 동선과 경사도를 빨간색으로 표시한 안내판이 신기해 나도 모르게 카메라로 열심히 찍고 있던 참이었다. ‘아, 나 휴가 온 거지.’ 안내판을 찍던 휴대폰 카메라를 머쓱하게 주머니에 넣었다.

독일 소도시 뉘른베르크의 한 어린이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함께 휠체어 전용 그네를 타던 아이, 베를린 지하철 승무원이 설치한 발판 위로 휠체어 장애인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익숙하게 오르내리는 모습. 그리고 휠체어 동선과 경사도까지 표시된 츠빙거 궁전 관광 안내판까지. 9박10일 독일 여행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들이다. 지금까지 기사나 논문 등으로 접했던 독일의 장애인 이동권 ‘사례’는 그렇게 여행 도중 뜻하지 않게 만난 세 장면으로 다가왔다.

한국 관광객이 짧게 머물면서도 느낄 만큼 독일의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세계적인 모범으로 꼽힌다. 이미 독일 수도 베를린은 2009년부터 모든 시내버스가 저상버스다. 2013년에는 모든 지방자치단체가 2022년까지 장애인의 대중교통 접근의 불편함을 완전히 해소하는 ‘배리어 프리’(Barrier Free)를 의무화한 ‘승객운송법’을 통과시켰다. 독일에선 지금도 신속하게 법을 실행하라며 장애인 단체 활동가들이 열차와 트램 운행을 막는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 참사 이후 21년 동안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이어져왔지만, 우리는 지난해에야 저상버스 보급률을 2021년 말 기준 30.6%에서 2026년까지 62%로 높이겠다고 했다. 독일 여행에서 인상 깊었던 순간들이 언제쯤 우리들의 일상이 될 수 있을지, 아득하기만 하다.

이 글을 쓰는 도중 아직 독일에서 여행 중이던 엄마와 아줌마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 다음 여행은 어디로 갈까?” 글쎄… 다음 휴가지에선 어떤 장면들을 마주치게 될까. 아무튼 가능한 한 먼 곳으로 떠나보고 싶다.

jy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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