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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총 들고 일제와 싸웠던 박차정’ 그를 기억해야지, 우리가

등록 2023-09-05 16:20수정 2023-09-05 18:42

해방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고 말하는 자는 일제로부터 독립할 거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은 이들이다. 한반도 땅 곳곳에서,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소련에서 중국에서 몽골에서 하와이에서 멕시코에서 미국에서, 집에서 역에서 시장에서, 교회에서 성당에서 절에서,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이, 총으로 칼로 맨몸으로 억압과 폭력과 부정의에 저항했다.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만든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비문. 로드스꼴라 제공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만든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비문. 로드스꼴라 제공

[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김현아 | 작가·로드스꼴라 대표교사

5년 전 이야기다. 로드스꼴라 학생들과 약산 김원봉의 고향인 밀양을 여행하며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하루는 박차정의 무덤에서 만나기로 했다. 오전에는 팀별로 여행하다 오후 두시쯤 그녀의 묘에서 다 같이 모이기로 했다.

송악마을 공동묘지. 그곳에 그녀가 있다고 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길을 걸어 산으로 향해 난 길로 접어들었다. 아무런 표지판이 없었다. 한참을 올라가니 무덤들이 늘어서 있었다. 어느 묘가 박차정의 묘일까. 묘비가 모두 한자라 청소년들은 이, 김, 박 같은 성들을 더듬더듬 읽어내며 박차정 박차정 친구 이름을 부르듯 그녀의 묘를 찾았다. 다른 팀들도 도착해 공동묘지는 명절처럼 붐볐다.

어, 여기 아니에요? 꼭대기 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박○○ 여○의 ○, 이라고 쓰여 있어요. 아는 한자만 고래고래 읽어주었다. 맞았다. 묘비에는 若山 金元鳳 將軍의 妻 朴次貞 女史의 墓(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 박차정 여사의 묘), 라고 쓰여 있었다. 잔디가 제대로 자라지 않아 삭막하고 조금 처연했다. 무덤을 찾느라 땀을 뻘뻘 흘린 터라 물도 마시고 더위도 식힌 뒤 우리는 가지고 온 꽃을 봉분에 얹었다. 빨강 노랑 분홍 보라 하양, 그녀를 위해 각자가 골라 온 스무송이 남짓한 꽃들을 동그랗게 놓으니 화관을 쓴 듯 봉분이 화사해졌다. 준비해 온 노래 한곡 부르고 음복하듯 간식도 나누어 먹었다.

2018년 4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에서 노래하고 있다. 로드스꼴라 제공
2018년 4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에서 노래하고 있다. 로드스꼴라 제공

그런데 왜 약산 김원봉 장군의 처라고 쓰여 있어요? 누군가 물었다. 그러게. 음, 네가 박차정의 묘비를 썼다면 뭐라고 썼을 거 같아? 녀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흠, 독립운동가, 뭐 이 말은 들어가야죠. 녀석의 질문을 계기로 우리는 갑자기 묘비문에 들어갈 문장을 만들어 보았다. 죽은 사람을 몇 글자로 요약하자니 그 사람이 살았던 생을 톺아볼 수밖에 없었다.

여성운동 했잖아요. 그렇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표적인 여성운동단체였던 근우회 활동을 했다.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고 주도하는 역할을 함께 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의열단 활동도 했잖아요. 맞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교양, 세계사와 혁명사 따위를 가르치고 군사훈련도 담당해 지도한다. 무장투쟁도 했잖아요. 맞다. 조선의용대에서 활약한다. 중국 곤륜산(쿤룬산) 전투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생을 마감한다. 해방을 한해 앞둔 1944년의 일이다.

이듬해 해방이 되자 김원봉은 부인이자 동지인 박차정의 유골을 품에 안고 그의 고향 밀양으로 돌아온다. 부산이 고향인 박차정의 묘가 밀양에 있는 까닭이다. 김원봉이 돌아와서 그때 뺨 맞았잖아요. 그 친일 경찰 누구더라. 누군가 말하자 노덕술 노덕술, 다시 누군가 그 친일 경찰의 이름을 댔다. 청소년들은 밀양의 독립운동가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들의 퍼즐을 맞추어나갔다. 독립운동가가 해방된 조국에서 핍박받는 이야기에 녀석들은 가장 분노했고 이해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가지를 뻗던 이야기는 다시 박차정에게로 돌아왔다.

‘총을 들고 일제와 담대하게 싸웠던 독립운동가 박차정을 기억하길…’

청소년들이 정리해낸 묘비문이다. 이거 팻말로 만들어놓고 가요, 한글로. 누군가 제안했다. 오 멋진데. 뭐로 만들 수 있을까? 여기 나무 많으니 이용하고요, 색연필도 있고 매직도 있고 펜도 있고 다 있어요. 몇몇의 말에, 좋아요, 웬일인지 녀석들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그런데 찾아오는 길도 너무 힘들어요, 길 안내하는 팻말도 같이 만들어요. 좋아 그럼 역할을 나누자. 팀별로 구간을 나누어 표지판과 이정표를 만들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곳에는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 그녀에게 가는 길, 이라는 안내판이 섰다. 헷갈리는 지점마다 화살표를 만들어 방향을 알리고 박차정묘 가는 길 181걸음, 이라는 말뚝도 박았다. 묘 옆에는 한글로 된 묘비문을 세웠다. 신이 나서 일을 하는 녀석들을 보니 어쩐지 뭉클했다.

독립운동사를 주제로 공부하던 학기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지점 건물이나 일본영사관이 그대로 보존된 목포에서는 나라를 잃는 것이 무엇인지 공부했다. 쌀을, 말을,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자존심을 남김없이 빼앗기는 것이 식민지 백성의 삶이었다. 천안에서는 3·1운동이 1919년 3월1일 파고다공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으로 알고 있다면 대단한 오해와 왜곡이라는 걸 공부했다. 같은 날 평양과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지에서도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3월10일을 전후해서는 경상, 전라, 충청, 강원도까지 확산했으며 5월 말까지 전국 218개 군에서 200만여명이 줄기차게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600만~1700만이었음을 고려하면 굉장한 일이었다.

3·1운동은 청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많은 독립운동가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섰다고 말한다. 시위는 만주와 연해주, 미주로도 이어졌다. 북간도에서는 1만여명 한인이 모였고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도 일제의 폭압적인 통치를 규탄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 한반도를 넘어 이토록 대대적인 네트워크 운동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이 사람들에 관해 조금 더 많이 알아보기로 했다. 오늘 내 삶의 터전과 조건을 만들어준 사람들이지 않은가.

2018년 4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로 가는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로드스꼴라 제공
2018년 4월 여행학교 로드스꼴라의 학생들이 독립운동가 박차정의 묘로 가는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로드스꼴라 제공

서울은 발 딛는 모든 곳이 독립운동의 흔적이었다. 보성사 터, 조선어학회 터, 조선건국동맹 터, 만민공동회 터, 신간회 터, 김상옥 의거 터, 나석주 의거 터, 이재명 의거 터, 정미의병 발원 터, 대동인쇄직공파업 터, 유관순 우물 터, 조소앙 활동 터, 여운형 활동 터, 태화관 터….

해방은 도둑처럼 오지 않았다. 해방이 도둑처럼 왔다고 말하는 자는 일제로부터 독립할 거라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은 이들이다. 한반도 땅 곳곳에서, 만주에서 연해주에서 소련에서 중국에서 몽골에서 하와이에서 멕시코에서 미국에서, 집에서 역에서 시장에서, 교회에서 성당에서 절에서,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이, 총으로 칼로 맨몸으로 억압과 폭력과 부정의에 저항했다.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뭇 생명을 살렸던 사람들. 기억하고 전승해야 할 이야기. 지상에서 영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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