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19일 오전 경북 예천군에서 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던 채아무개 상병이 급류에 휩쓸려 실종됐을 당시 다른 해병대 동료의 모습. 연합뉴스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 | 오픈데스크팀장
대부분의 전역자가 그러하듯, 군 시절 중 어두웠던 기억은 시간이 흐르며 편집됐다. 누군가의 한마디 때문에 멀쩡한 바리케이드에 페인트칠을 다시 하거나, 며칠 밤을 새워가며 현실과 동떨어진 매뉴얼을 만들어야 했던 순간들은 점점 흐릿해지고, ‘그때 참 고생했지’라는 식으로 포장된다. ‘군대가 원래 그렇잖아’ 하는 자조와 함께. 그런 식으로 과거를 적당히 지워두지 않으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지 못하고 부조리한 상황을 바꾸지 못한 순간들에 대한 자책감이 솟아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병사들에게 휴대전화가 지급되는 시대이니까, 이제는 달라졌겠지.
그러나 잊을 만하면 군에서 참담한 사건이 터지고, 이에 관한 온라인 커뮤니티와 댓글 창의 여론을 좇다 보면 다시금 어두운 기억이 비집고 나온다. 해병대 채아무개 상병이 집중호우 실종자를 수색하다 급류에 휩쓸려 숨지고, 그 조사 과정에서 수사 축소·외압 의혹이 제기된 지금도 그렇다. ‘보여주기’와 ‘책임회피’. 군 생활 동안 나를 괴롭혔던 단어들이 소환된다.
“해병대가 눈에 확 띌 수 있도록 가급적 적색 티 입고 작업”. 임성근 해병대 제1사단장의 수색작업 당시 지시사항이다. “훌륭하게 공보활동이 이루어졌구나”. 채 상병이 실종되기 두시간 전, 해병대의 수색 작업을 다룬 언론 보도를 보고 임 사단장이 공보정훈실장에게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다. 군의 ‘보여주기’가 여전한 것 같아 씁쓸했다.
학사장교로 임관해 자대에 배치된 뒤 내게 매 순간 강조되던 ‘군기’ ‘전투력 강화’ ‘군인의 명예’는 팔할이 보여주기 같았다. 진급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는 지휘관의 고과를 좌우했던 것도 얼마나 ‘보여주기’를 잘했느냐에 달려 있는 듯했다. 이는 현장의 안전이나 업무의 경중을 따지는 일보다 우선시되곤 했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 피해 당시 수색 작업 성과로 주목을 받았던 임 사단장에게 올해의 수해 현장은 또다시 성과를 보여줄 ‘무대’에 불과했을까.
보여주기에 몰두하는 이들에겐 ‘책임의 경계’를 그리는 일도 중요하다. 어떤 문제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책임의 경계란 ‘무한 책임을 지겠다’가 아니라 지휘 라인의 위로 올라갈수록 ‘최소한의 책임만 지겠다’는 의미라는 걸 점차 깨닫게 되었다. 나 역시 무감각하게 책임의 반경부터 따지는 데 익숙해졌을 때, 이런 책임 따지기가 군 조직을 유지하는 안전장치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대령)의 채 상병 순직 사건 조사 결과에서 사단장 등의 혐의를 제외하여 윗선에 면죄부를 주길 원했던 이들을 보며, 책임에 항상 민감해하던 상관들 몇몇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지휘관이 알아서 하세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라며 아무렇지 않게 책임을 회피하던 넷플릭스 드라마 ‘디.피.’(D.P.) 시즌 2의 악역 구자운 준장의 표정도 떠올랐다.
이들에게는 채 상병과 같은 장병들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에서 그래 왔던 것처럼 “엄연히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있는 사람에게 딱딱 물어야 하는 것”이며 “그냥 막연하게 다 책임져라, 그것은 현대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얘기”라는 대통령의 ‘철학’에 이번에도 충실히 따른 것뿐일까.
책임을 외면하는 ‘높은 분’들 대신, 군 법원에 출석하던 박 대령의 손을 잡았던 동기들이 국가의 염치를 묻는다. 해병대 전우회 누리집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진실을 밝히라며 비겁한 책임회피를 비판하는 예비역들은 진정한 군인의 명예란 부조리나 부정의가 아니라 진실과 책임으로 가능하다고 외친다.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고, 더는 군인과 예비역들을 자괴감으로 초라하게 만들지 말라고 분노한다. ‘디.피.’의 주인공 안준호의 질문에 이번에도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또다시 절망과 자괴감이 우리 사회를 휘감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거면, 아무도 어쩔 수 없는 거면, 그럼 누가 감당해야 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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